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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한 분인 이기풍 목사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우학리교회에서 순교하다

  • 입력 2016.05.14 07:58
  • 수정 2016.05.16 22:27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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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년의 역사를 가진 우학리교회.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분인 이기풍목사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 오문수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우학리에는 110년의 역사를 간직한 우학리교회가 있다. 여수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남면 우학리가 어디쯤에 있는지 잘 모른다. 오히려 비렁길로 유명한 금오도 소재지의 초중고 뒤편에 있는 예쁜 교회를 생각하면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우학리교회는 1906년 4월 5일 여수군 남면 우학리 냉수동 332번지에서 안돌영, 김문옥의 두 가정이 모여 가정 예배 본 것을 시작으로 탄생했다. 우학리교회는 순수하게 지역유지들의 힘으로 설립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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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우학리교회 모습
ⓒ 오문수

 

1925년 중국 건축기술자를 고용해 적벽돌로 된 건평 99㎡ 변식스타일로 지어진 예배당은 1970년 제1차 예배당 증축공사를 했고, 1976년 12월 제2차 증축을 통해 연건평 528㎡의 2층 건물을 완공했다. 2001년 7월에는 예배당 외벽을 적벽돌로 치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60년대 초 사이에는 장년자의 출석수가 3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부흥하였으며 주변의 수많은 교회들을 낳는 산파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한미조약이 성립된 후 1884년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부터다. 때문에 육지도 아닌 여수의 작은 섬에 백년이 넘는 역사가 있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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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목사 순교기념비 뒤편에 보이는 건물이 이기풍목사 순교기념관이다
ⓒ 오문수

 

게다가 한국인 최초 목사 중 한 분인 이기풍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교회이기도 하다.

복음의 훼방꾼이었다가 순교자가 된 이기풍 목사

우학리교회 입구 오른쪽에는 이기풍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다. 2006년 교회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관에는 이기풍목사 재직 당시의 비품과 유품들이 정리되어 있다. 교회에는 당시 미국에서 선물로 보낸 풍금이 있다. 건반에는 영어로 쓰여진 글씨가 적혀 있고 78년이나 된 당회록도 보관되어 있다.  다음은 1938년 4월 17일 오전 11시에 김문옥 장로가 쓴 당회록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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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에 비치되어 있는 78년된 당회록
ⓒ 오문수

 

"오전 11시에 전 주일에 광고대로 본 예배당에서 부활주일을 지켰는데 본 교회 목사 이기풍씨가 찬송과 기도로 개회하고 성경은 잠언 11장 1절부터 11절까지 보시고 부활이란 제목으로 강도하고 입교 문답에 합격된 김양선을 입교시키고 전일 학습 문답에 합격된 명선자, 김정애,김정엽, 박업비, 신문례, 정안심, 김소심, 안말심, 정두심, 안기창, 이상국, 조길문 이상 12인을 학습세우고 성찬 예식을 거행한 후 133장 찬송과 축도로 폐회하다"

뿐만 아니라 이목사가 살아온 내력도 잘 정리되어 있다. 한국기독교성지순례 선교회장 박경진 장로가 이기풍 목사의 살아온 내력을 기록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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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풍목사 가족 사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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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기풍은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로 젊은 날을 허송세월하였다. 그는 1890년 평양장터에서 노방 전도하던 마펫(S.A Moffet)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 치게 하고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순 복음의 훼방꾼이었다.

한편 청일전쟁으로 식구들이 원산으로 피난가 힘겹게 살다가 스왈른 (W.LSwallen)선교사를 만나 옛날 일이 생각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예수를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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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보내준 풍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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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보내준 풍금의 건반에는 영어로 쓴 글씨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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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교 제1회(1907년) 졸업생으로 한국인 목사 최초 7인 중 한 명인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이듬해 제주에 도착해 성내교회 등 12개 교회를 설립하면서 제주 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그 후 광주, 순천, 고흥, 벌교에서 목회하다가 1937년 10월 70세의 고령으로 우학리 교회에 파송됐다. 돌산, 안도 등 인근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던 이기풍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다.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 강요에 못이겨 관사 뒤편에 세워져 있던 신사당으로 끌려가는 교우들과 주민들을 가로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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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참배하러 가는 사람들을 가로 막는 이기풍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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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신사에 절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때면 일본 순사(경찰)는 이기풍 목사를 향해 총개머리를 휘둘렀으며 넘어지면 구둣발로 마구 짓밟았다.  1940년 11월 15일에 여수 경찰서에 수감됐던 이 목사는 모진 고문과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1942년 6월 20일 우학리교회에서 순교반열에 오름으로 한국교회에 큰 감동을 주었다. 

당시 제주도 가는 교통편이 너무 힘들어 제주도에 파송되는 것을 해외파견으로 여길 정도로 열악한 가운데 제주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70이 넘어서 우학리 교회에 부임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이기풍 목사는 기독교계의 큰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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