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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를 바라보다 40년전 친구 소식을 들었다

금오도 비렁길 4코스를 가다

  • 입력 2016.06.15 16:01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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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금통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모습. 비렁길을 찾으면 이런 아름다운 바다가 널려있다.
ⓒ 오문수

여수에서 20㎞ 떨어진 금오도 비렁길 4코스 탐방에 나섰다. 금오도 소재지인 우학리에서 10여 분쯤 가면 움푹 패인 포구가 나온다. 파도에 깎여 동그라미가 된 돌들이 굴러다니는 포구 주변에 1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 4코스 출발점인 학동이다.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몸도 비워야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래야 주위에서 나는 새소리와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들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마음과 몸속에 켜켜이 쌓여있던 앙금도 내려놓아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유자적할 수 있다.

그런데 엊저녁에 지인으로부터 금오도 별미를 마음껏 먹었는지 뱃속이 거북하다. 그렇다고 산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볼 처지가 아니다. 금오도 비렁길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연간 50만 명이나 찾아오는 명소가 됐으니 자칫 잘못하면 망신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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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코스 출발점인 학동에 있는 공중화장실. 깨끗하게 정돈된 화장실에 감탄했다.
ⓒ 오문수

 

학동까지 태워준 지인의 차는 이미 떠나버렸고 "어쩌지?" 하며 고민하던 찰나 눈앞에 화장실이 보였다. 화장실이 부족하다는 민원도 들었던 터라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깨끗하다. 화장지까지 다 구비됐으니 이만하면 됐다. 유럽을 돌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만큼 화장실 인심이 좋은 나라는 별로 없다. 대부분이 깨끗하고 공짜다. 이제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바위와 나무사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시간. 꿩이 푸드덕 날고 뻐꾸기가 짝을 찾는다. 바다 한가운데 배 한 척이 파도 그림자를 내며 달리고 세상사의 찌꺼기를 털어버린 채 혼자 걷는다.
 

풀숲에 하얗게 피었다 노랗게 익어가는 인동초가 나를 반긴다.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피는 인동초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별칭이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서 예쁜 꽃을 피우는 인동초 핀 곳을 지나가면 멀리서도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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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인동초. 고 김대중 대통령의 별칭이기도 하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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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한 찔레꽃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풍뎅이들. 사진을 찍자 죽은척했다. 사랑을 방해하는 게 아닌데 미안했다.
ⓒ 오문수

 

어릴적 친구들과 6월 이맘때쯤 산에 올라가면 찔레꽃향기와 인동초 향기에 취해 행복감에 젖었었는데…. 아! 아쉽다! 그 아련한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나를 파면하겠다는 부당한 명령에 증오와 분노에 휩싸인 10년 동안 건강을 잃었다. 순리를 거스린 그 사람은 지난해 연말에 죽었다. 망자가 세상을 떠나는 날 용서를 했지만 내 심신은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치료하기 위해 먹은 약 때문일까? 그 달콤한 냄새를 맡을 수가 없어 속상하다.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밖에!

몇 발자국 더 올라가니 찔레꽃에서 암수 한 쌍의 풀벌레가 사랑을 속삭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냄새를 맡아본다. 역시 감각을 잃어버렸다. 달콤한 꽃냄새 속에서 사랑하는 모습이 귀여워 사진을 찍으려니 꼼짝 않고 죽은척하는 녀석들. 괜히 방해했나보다.

미안해하며 온금통 전망대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본다.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생각들…. 사랑, 미움, 증오, 분노, 회한들이 윤동주의 <자화상>이 되어 떠오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우물이 내겐 바다가 되었다. 여태껏 살면서 남한테 욕먹지 않고 살만큼 산 것도 행복이려니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문수냐? 나 ooo인데 기억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니고 고등학교시절 헤어진 후 40년 동안 한 번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친구다. 부평에서 소아과 병원을 운영하는 친구. 공부만 하느라 두꺼운 안경을 끼고 다녔던 착하기만 했던 친구. 내가 글을 쓴다는 소식을 듣고 항상 들여다본다는 친구다. "시간을 내서 여수로 놀러오라"는 말에 친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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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렁길 4코스 주변의 제멋대로 꼬불꼬불하게 자란 나무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보았던 나무를 연상케 했다.
ⓒ 오문수

 

"야! 의사라고 하니까 다들 부럽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병원을 지켜야하니 어디 맘 놓고 놀러갈 시간이나 있는 줄 아냐? 너는 교사였잖아. 방학도 있고 하니 여행할 시간도 있어서 인생을 즐길 수 있잖아. 네가 부럽다."

전망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시간을 거꾸로 돌렸다. 옛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강으로 쏘다니며 뛰놀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래 친구야! 건강하게 잘 살아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무 숲 터널을 지나는데 반대쪽에서 10여 명의 아주머니가 재잘거리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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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에서 여행왔다는 세 친구들이 대나무 터널에서 멋진 포즈를 취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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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금오도 비렁길 여행 온 두 자매가 배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민박집과 비렁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줬더니 서울로 돌아간 자매가 비렁길을 둘러본 소감을 보내왔다. "1코스부터 5코스까지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비렁길의 오묘함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어요. 여행지에서 만난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오문수

 

깔깔거리며 가볍게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웃었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금오도 황토민박'이라는 조그만 간판이 보여 길을 따라 올라갔다. '여기서부터 700미터'라는 글을 읽고 나섰는데 1㎞가 넘는 것 같다.

단풍나무와 후박나무로 둘러싸여 단아하고 예쁜 꽃으로 둘러싸인 민박집. 집 앞 아름드리 감나무 밑에는 작은 평상이 놓여 있었다. 인사를 하자 열심히 일하던 부부가 반긴다. 이곳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퇴직한 후 4년전에 귀향한  김동철(65)씨가 '못등'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긴 내력과 민박집을 시작한 연유를 들려줬다. 그는 3천평 밭에 고로쇠나무와 손님접대용 토종닭을 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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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렁길 4코스가 시작하는 학동 뒷 산 정상부에 있는 '금오도 황토민박집'. 도시에서 생활하다 퇴직한 후 귀향한 김동철씨가 110년 된 한옥을 리모델링해 지었다. 3천평 밭에 고로쇠나무를 심고 토종닭을 기른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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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나비가 나무위에 잔뜩 앉아있는 모습을 한 산딸나무 모습. 황토민박집으로 가던 길에 마주쳤다.
ⓒ 오문수

 

"저 아래 조금만 내려가면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의 잔디밭이 있는데 잔디를 띠라고 하잖아요. '띠가 있는 언덕'이라는 의미에서 '띠 모(茅)'에 언덕이라는 뜻의 등(嶝)을 붙여 '모등'이 못등으로 변화했다는 설과, 큰 못이 있었는데 백씨 가문의 처녀가 못에 빠져 죽어 못을 메워버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넓은 잔디밭에는 동학란 때 농민군이 몰래 숨어 들어와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설이 구전되고 있습니다."

퇴직하면 고향에 돌아와 살겠다고 결심한 김동철씨는 110년 전 조부가 지은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500만 원만 들여 리모델링하겠다고 했지만 부인 고옥자씨의 주장을 따랐다.

"시골에 들어와 산다는 것은 도시와 다르게 집을 짓는다는 것이잖아요. 기왕 고치는 김에 황토 집을 짓기로 했어요. 돈이 훨씬 많이 들었죠. 리모델링한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이 민박을 해보라고 권유해 시작했는데 주말에는 방이 없어요."

포구가 깊다 하여 '심포'라 이름 지은 산책길 주변에는 전국각지에서 여행 온 아주머니들이 바닷가 나무그늘에서 점심을 먹는다.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바닷가 풍경과 바다를 바라보며 나그네가 되어볼까 했지만 여수로 돌아갈 뱃고동 소리가 내 발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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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구가 깊다 하여 붙여진 이름 '심포' 모습. 점심시간이어서 일까? 배들도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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