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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 없이 봉인된 '투표함', 29년 만에 연다

1987년 '부정 선거' 의혹 일었던 구로구을 투표함... 7월 공개검증 결정

  • 입력 2016.07.01 18:39
  • 수정 2016.07.01 18:42
  • 기자명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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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중앙선관위가 보존 중인 1987년 대선 구로구을 우편 투표함
ⓒ 한국정치학회 제공

 

1987년 대선 당시 선관위가 개함하지 못한 서울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이 오는 7월 14일(목) 드디어 열린다. 한국정치학회가 민주화운동 30년과 19대 대선을 앞두고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을 열어 진위를 가리자고 제안했고, 중앙선관위가 이를 받아들여 공개검증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투표함은 중앙선관위가 29년째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공개 검증이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 오랜 부정선거 논란의 종지부를 찍는 해결 상자가 될지 예측불허 상황이다.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은 이른바 '구로구청 사건'을 촉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13대 대통령선거 투표가 한창이던 1987년 12월 16일 오전 11시 20분경, 구로선관위 직원들이 구로구청에서 부재자 우편 투표함을 트럭에 옮겨 싣는 장면을 한 시민이 발견하고 '부정투표함이다'고 소리치자 주변의 시민이 삽시간 그 트럭에 몰려들었다.

'구로구청 사건'의 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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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함 조기 이송 트럭 시민들이 제지한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이송 트럭
ⓒ 영화 <돌 속에 갇힌 말> 자료 화면 캡처

 

이날 오후 5천여 명의 시민이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자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시민들은 이틀간 투표함을 지키며 대선 부정선거 규탄 농성을 이어갔다. 18일 새벽, 경찰은 수천 명의 백골단과 헬기까지 투입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폈다. 이 과정에서 무려 1천여 명의 농성자가 연행되고 100여 명의 구속자, 5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것이 이른바 '1987년 구로구청 사건'이다.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은 이틀 만에 선관위에 되돌아갔으나 선관위는 이 투표함을 개함하지 못한 채 대선 개표를 마감하였다. 부재자신고인명부, 부재자신고서, 우편투표접수부 등 구로을 선거 서류가 농성과 진압 과정에서 소각돼 본인 발송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로구을 우편투표함은 이틀 만에 선관위에 되돌아갔으나 선관위는 이 투표함을 개함하지 못한 채 대선 개표를 마감하였다. 부재자신고인명부, 부재자신고서, 우편투표접수부 등 구로을 선거 서류가 농성과 진압 과정에서 소각돼 본인 발송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위 노태우 후보와 2위 김영삼 후보의 표차가 2백만 표에 달해 구로을 투표함을 무효처리해도 최종 개표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는 선관위의 판단도 작용했다. 하지만 구로구청 투표함 사건은 야당이 구로구선관위 직원을 고소를 하고 국회에서 선거부정조사특위를 구성하는 등 대선 이후에도 수년 간 논란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민자당 출범의 충격과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덧 이 사건은 명쾌한 진상규명과 결론도 없이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구로구청 사건은 2004년 <돌 속에 갇힌 말>이란 독립영화 개봉으로 오랜만에 다시 수면 위로 잠시 떠올랐다. 감독 나루는 구로구청 사건 당시 공정선거 감시단 활동을 하는 앳된 대학생으로 그 현장에 마지막 백골단의 진압 때까지 있었다. 그는 이 참혹한 기억으로 트라우마에 줄곧 시달렸다. 그러다가 5년 동안 수많은 관련자를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구로구청 사건 당시의 영상들을 발굴, 수집해 다큐 영화로 제작했다.

<돌 속에 갇힌 말>은 신인 독립영화 감독의 작품치고는 적지 않은 호평을 받았다. KBS 독립영화관에서 방영 예고까지 나간 적도 있다. 그럼에도 서울선관위의 이의제기에 따른 부담감과 계약상 이견 등의 문제로 아쉽게도 끝내 전파를 타지는 못했다.

구로을 우편투표함이 실제로 '부정 투표함'인지 여부를 가리는 데 있어 영화 <돌 속에 갇힌 말>에 담긴 자료 영상 중에 특히 주목해 볼 만한 장면이 있다. 구로구청에서 농성 중이던 시민들이 구로선관위 사무과장과 선관위 위원장을 세워 놓고 사회자를 통해 신문(訊問)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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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구선관위 사무과장 시민들의 신문에 답변하는 답변하는 구로구선관위 사무과장
ⓒ 영화 <돌 속에 갇힌 말> 캡처

 

시민들은 우편투표함이 옮겨진 시간에 의혹을 제기했다. 선거 도중에 옮긴다는 게 통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무과장은 자신이 11시 20분경 투표함 옮기라 했다며 "업무의 편의를 위해 부재자 투표함을 개표장으로 미리 옮겨두려는 거"였다고 해명하였다. 투표함 이송에 대해 위원장에게 보고하고 허락 받았는지 묻자 "위원장에게 허락받은 사실은 없다"며 "위원장의 허락을 받아서 옮기라는 규정이 없다"고 하였다.

빵과 과자 속에 숨겨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답했다. "(선관위 사무실에서 발견된) 인주 묻은 장갑, 1500매의 백지투표지가 있었는데 이 물건들은 어디에 사용하려고 했는지" 묻자, "투표구 위원회 정당 간인을 할 때 파지가 나오면 교체해 주려고 하는 거"라 말했다.

구로구선관위 위원장은 "투표함 호송에 관한 (법적) 근거가 별로 자세한 게 없다"면서도 "보통의 경우에는 관례에 따라 선거관리 위원 중 2~3명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고, 오후 6시에 옮기는데 오전에 가져간 것이 절차상 하자가 있고 선관위 위원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 절차상 관례에 따르지 않았다,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부정투표 의혹, 이번엔 가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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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골단의 진압 구로구청 농성자들을 연행하는 백골단
ⓒ 영화 <돌 속에 갇힌 말> 자료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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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골단의 진압
ⓒ 영화 <돌 속에 갇힌 말> 자료 화면 캡처

 

후에 중앙선관위는 선거사를 기록해온 공식 기록물 <대한민국선거사 제4집>에서 위의 법을 언급하며 부정선거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1987년 11월 7일 제정된 '대통령선거법'을 살펴보면 "우편투표는 선거일의 하오(오후) 6시까지 관할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에 도착되어야 한다"(제96조의 3항)고 규정한다. "투표함을 송부하는 때에는 각 후보자별로 투표참관인 1인식을 동반할 수 있으며 호송에 필요한 경찰 공무원은 2인에 한하여 동반할 수 있다"(제114조 2항)고도 돼 있다.

"당시 <대통령선거법>에는 우편 투표함을 몇 시에 옮겨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제117조(개표개시)와 <대통령선거법시행령> 제59조(우편투표함의 비치)에 의하면 '우편투표함은 관할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 사무소 안에 비치하고, 우편투표함도 선거일 오후 6시부터 개표하도록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구로을 선거관리위원회가 우편투표함을 오후 6시 이전에 개표소로 옮기려고 한 것은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었다."

구로을 우편투표함이 '부정 투표함'인지 여부는 오는 7월 14일 투표함을 열어 면밀히 조사해보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관련 선거서류가 없는 상태이고 선관위가 29년 간 보관하면서 자체적으로 그 투표함을 한 번도 개함한 적 없음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투표지의 잉크가 지워져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

한국정치학회가 제안하고 중앙선관위가 '1987년 대선 구로을 우편투표함 진위검증 연구용역'을 맡아 진행한다는 사실도 당시 농성에 참여해 고초를 겪은 시민들 입장에서는 취지대로 공정한 연구가 가능할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한국정치학회나 중앙선관위도 이런 몇 가지 우려를 모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구를 수행하는 공동연구원 중 한 사람인 조진만 교수(덕성여대, 정치외교학)는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동안 학회와 선관위에서 1987년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공개검증에 대한 몇 차례 제안이 있었음에도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 '시기상조다'라는 의견이 우세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교수는 "지난 총선 이후 한국정치학회가 민주화운동 30년과 내년 대선을 맞이하며 구로을 우편투표함 공개 검증을 제안했고, 지금쯤은 괜찮은 거 같다는 합의가 돼 개함이 이루어지게 됐다"고 그 배경을 설명하였다.

구로을 우편투표함 공개 검증이 성숙한 선거문화와 민주주의 진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지 긁어 부스럼으로 비화될지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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