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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일기 (18) 세 가지 피리소리

  • 입력 2016.08.10 09:03
  • 수정 2016.08.10 22:14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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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의동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너는 하늘 땅 사람이 내는, 세 가지 피리소리를 아느냐?”

“너는 사람이 부는 피리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땅이 부는 피리소리를 들어보았느냐?”

“그리고 거기에서, 하늘이 부는 피리소리를 들어보았느냐?”

 

위대한 스승 장자(기원전 370-280년)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이다.

장자, 내편,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세 가지 피리소리(天地人 三籟)가 오늘의 새벽, 나의 미명을 깨우고 있었다.

혼몽한 가운데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따라서, 지금 나는 그 소리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있다.

중국 윈난(云南) 지방의 리장(麗江)에 갔을 때의 일이다.

윈난 성은 중국대륙의 서남쪽 변방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미얀마와 라오스를 연접하고 있으며,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소수민족의 집성지이다.

남방에 위치하면서도 해발 2천 미터를 전후한 높은 고도의 지역인 까닭에 춘하추동 사계가 꽃 잔치를 벌이는 봄가을의 날씨가 된다. 한겨울에도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며,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다니는 곳이니, ‘사철이 꽃피는 춘삼월’이라는 운남에 대한 소개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출발지이며, 티베트 고원 밑의 구름의 남쪽에 자리 잡은 땅 윈난 지방은, 중국대륙의 입장으로 보면 남쪽의 이방인, 변방 오랑캐들의 오래된 고토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나, 이곳을 찾는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가히 그 지형적, 문화적, 역사적 다양성과 독특함 때문에 오히려, 한 번 더 찾고 싶고, 보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기도 할 것이다.

성도(城都)인 쿤밍에서 역사적인 대리국의 자취가 잘 보존되어있는 다리로, 다시 다리에서 역사의 고도 리장으로, 산등성이들의 모롱이를 둘러쳐 난 옹벽한 산길과 들길을 아스라하게 넘기도 하고, 비탈진 고원이 조성한 천애의 낭떠러지 길을 타고 넘는 위험한 곡예를 계속하면서, 깎아지른 단애 마주해 보기에도 위험천만한 협곡을 가로지르다보면, 목전에 눈부시고 휘황한 광채를 마음껏 발하고 있는 옥룡설산(5595m)을 대면하게 된다.

6천 미터 설산의 위용이란 저런 것인가.

티끌 한 점 없이 투명한 하늘 바로 밑에서 그 자체로서 빛나는 태양의 분신, 아니 태양을 포옹한 빛의 현현(顯現), 이랄 수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설산의 신성함을 눈앞에 마주하고서 우러나오는, 찬탄과 외경심이라니.

‘아름다운 강’이라는 리장(麗江)의 명칭이 말해주듯 이곳엔 진사강이 흐른다.

진사강은 티베트 고원의 중앙부를 서쪽에서 횡단해 동남방향으로 흐르다 마침내 장강(양쯔 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전체 길이 2308km, 유역면적 34만 평방km, 낙차는 3300m에 이른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오래된 고도 리장,

원시 자연을 방불케 하는 수려한 강줄기를 내려다보며, 그 강의 흐름을 따라 흐르고 흘러 시간마저 끊긴 듯한 적막한 산야에서, 자신들만의 오랜 풍습과 고유한 문화를 지키고 가꾸어온 하늘 아래 사람들, 리장의 토착부족은 ‘나시족’이다.

하늘로부터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빛을 가릴 생각도 없이, 그 햇볕의 밝고 따사로움을 일상으로 받고 마주하며 사는 이들 소수민족이, 조상 대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갈, 그들의 터전인 마을들과 골목들과 거리들은 정갈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은 다정했다.

나시족은 고대 강족의 한 가지이며, 모계중심의 부족으로 일처다부제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윈난 성 북부를 중심으로, 쓰촨 성 남부나 티베트 자치구 동부의 망캉 현에도 일부 분포하는 그들의 중국내 인구는, 30만 명(2000년도) 정도로 알려져 있다.

내가 쓰촨 성의 남쪽에 위치한, 연중 내내 운무 자욱한 다습한 지역, 아미산(3100m)을 잠시 떠나온 지 며칠 되잖아서, 처음 이곳 리장의 산과 들을 접했을 때 일어났던 감흥은 적잖았다.

그것은 아마도 햇볕을 잘 볼 수 없었던 아미산의 흐릿한 하늘 아래서 가슴속에 가두어 두기라도 했을 왠지 모를 답답함의 공기가, 이곳 한 점 가릴 것 없는 고원 지대의 탁 트인 하늘을 보고서 반가움에 놀라 일으킨 반응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철이 녹색지대인 아열대 상록수림의 아미산에 맞춰져 있었던 나의 시선에, 외려 낯이 설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지대의 소나무들이, 마치 나의 조국의 산과 들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그처럼 정겹게 들어온 탓일는지도 몰랐다.

전통의 가옥과 상점들, 그리고 거리의 주인인 토착주민들의 화려한 복색들이 아름다운 가운데, 세계 각국으로부터 찾아든 각양각색의 외국 방문객들의 모습 또한 다채롭고 이색적이다보니, 주인들과 손님들의 호기심어린 관심과 대화가, 따뜻한 나눔과 거래의 시공(時空)이, 전통과 현대가, 동서와 고금이, 멋들어지게 한데 어울린 조화와 평화의 진풍경이라니, 이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으리.

낮의 강렬했던 태양도 그 위세를 떨구는 즈문 석양 무렵엔, 이곳의 주인들인 나시족의 전통문화 공연 한마당이 펼쳐진다.

색색이 아름답고 빛깔 고운 복색을 하고서 갖은 치장을 줄줄이 달고 나온 남자와 여자들,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익숙한 몸놀림으로 연무를 하기도 하고, 청아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

합창과 독창의 무대가 청중들의 반응을 사로잡은 후엔 듣도 보도 못한 모양과 색깔로 된 악기들의 연주가 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나서 사회자는 초로의 한 중년 남성을 지목했고, 뜨거운 환호의 박수를 받고 등장한 그가 이윽고 꺼내든 악기는 달랑 한 개의 풀피리였으니, 풀이파리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피리를 모르는 국가나 민족, 개인이 있을까마는, 뿐만 아니고 풀피리만 해도 전통적으로는 가장 흔하고 쉬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악기라 말하기에도 왠지 어색할 만한 그런 도구가 아니던가.

구체적으로 잘 기억나지는 않는 그이의 피리 소리에 대한 나의 감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지금에 와서 말할 길은 물론 없다. 다만, 자연 그대로의 경이로움이랄까.

ⓒ 황의동

처음엔 풀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들 같기도 하다가 꽃들과 나비들이 왕래하는 웅웅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가 그리고 나서는 온갖 새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들 같다가 물소리 바람소리 빗소리 같기도 하다가 다시 새로 어여쁜 소년 소녀들이 종알종알 거리는 소리 같다가 누군가 미친 듯 화나서 달음질치는 소리 같다가 .....

다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하늘이 부르는 음성 같기도 하다가 .....

텅 빈 고요함으로 .....

가믈한 하늘이 보이고 .....

적막한 속에 충만한 기쁨이 샘솟았을 것이다.

뜨거운 박수소리와 환호의 소리와 휘파람 소리들이 광장의 하늘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 감동의 눈시울을 훔쳤고, 어릴 적 고향마을의 언덕 빼기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했던 나는, 얼떨결에 박수를 치고 일어나 무리들과 덩달아서 그 감동의 희열을 다투었다.

스승이 물었다.
“무엇을 들었느냐?”

내가 대답했다.
“욕망과 분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평생 내는 소리가 바로, 나의 생각과 감정의 구멍으로 내는 기쁨(喜)과 분노(怒)와 슬픔(哀)과 즐거움(樂)의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소리들이 그쳤다.

생각과 감정의 구멍을 통해 나오던 소리가 그치자, 평화와 행복이 그 자리를 메꿨다.

텅 빈 충만이 찾아온 것이다.
하늘이 내는 피리소리가 그 ‘텅 빔’ 속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하늘은 맑았고 새들은 지저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제자리에서 무언가를 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본래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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