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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에서 라즈기르, 다시 나란다 대학으로

India에서 행복의 길을 묻다 (4)

  • 입력 2016.08.25 09:49
  • 수정 2016.09.02 05:49
  • 기자명 정금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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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위험은 세계 어디나 ... 사원, 휴대폰 지참도 불가
복원 손길마저 못 미치는 유적들 많아
자연이 가져다준 갠지스의 범람은 인도인에겐 일상
무질서 속의 질서, 혼돈과 게으름 ...도대체 어디서?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 대탑

순례 3일 째 인도 보드가야의 새벽은 막바지 우기의 훈풍과 함께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예불을 시작하는 마하보디 이른 새벽부터 세계에서 나선 순례단으로 삽시간에 정문을 가득 채웠다.

사원의 출입은 엄격했다. 카메라는 100루피를 지불해야 지참이 가능하고 휴대폰은 일체 불허한다. 몇 년 전 이슬람으로 추정되는 교도들로부터 휴대폰 폭탄테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당시 마하보디 사원 대탑은 이슬람교 신자의 소유로 불교 유적을 이슬람교가 관리하는 관계로 순례단은 많은 비용을 지불하거나 출입을 통제하는 사례 등으로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후 유적에 대한 소유권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불교 측에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예불을 마친 순례단은 라즈기르의 왕사성 순례와 함께 부처님께서 최초로 법화경을 설법하신 영축산, 빔비사라의 감옥터, 부처님이 온천욕을 하셨다는 외지 목욕탕, 그리고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 터와 불교 최초의 나란다 대학 터를 순례하기 위해 일정을 서둘렀다.

보드가야에서 왕사성이 있는 라즈기르는 버스로 대략 2시간 남짓,

라즈기르 가는 길에 폭우로 농경지가 침수되고 가옥이 물에 잠겼다.

그러나 폭우로 다리가 끊겨 얼마나 우회해야 할지 소요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 갈 길은 멀고 마음은 조급하다.라즈기르 가는 길 위는 폭우가 할퀴고 간 삶의 생채기가 역력했다.곳곳의 농경지가 침수되고 가옥이 물에 잠겼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언제 폭우를 의심하기라도 하듯 늦은 모내기에 한창인 아낙들의 농사일 모습이 여행길을 싱그럽게 한다.

우려보다는 일찍 마가다국 왕사성에 도착한 순례단은 30여분의 도보로 부처님께서 최초로 법화경을 설법하셨다는 영축산에 올랐다.

영축산 오르는 길. 영취산으로도 읽는다.

해발 3백 고지, 광활한 대지를 한눈에 굽어볼 상서로운 성지였다.

부처님께서 60대 후반에서 70대에 이른 시기 바로 이곳에서 1,250명의 제자를 비롯해서 보살마하살, 그리고 깨우친 자, 덜 깨우친 자 등 수만이 모인 가운데 법화경을 설하셨을 것이다.

폭염속의 기도에도 나는 마치 제자 된 듯싶었고 굽어보이는 굵직한 초목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군중으로 다가왔다.

법화경은 보살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실행의 문제가 핵심이다.

이번 순례단을 이끌며 달라이라마 친견까지 도와줄 석천사 주지 진옥스님께서 마침 영축산 법화경 설법지에서 안내가 이어진다.

보살은 보리심을 발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보리심은 일체중생의 고통을 건지기 위해 부처님 처럼 되겠다는 결심을 혼자가 아니라 연을 맺은 모든 사람이나 무연의 중생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말한다. 결국 보리심은 모든 중생과 더불어 가는 것을 핵심 모토로 하고 있다.

부처님의 영롱한 법화경 설법 음성을 담고 순례단은 지근거리에 있는 빔비사라 감옥터와 부처님께서 생전 이용하시던 야외 온천탕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현지 인도인들의 대중 목욕탕과 인도인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온천욕 장소로 북적거렸다.

들르는 곳마다 성지여서 순례단은 누구나 합장 기도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법화경 설법지 영축산.

최초 불교사원으로 알려진 죽림정사는 복원의 손길마져 미치지 못한 안타까움 자체다.수 많았던 대나무들이 하얀 꽃을 피우고 80여년의 생을 마감했다.절터는 잡초와 고목들만이 무성했고 일부는 공원화 되어 주민들이 삶터가 되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태초에 불교 탑자리였으나 침략 이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가 이곳에 이중 삼중으로 묘를 설치하는 바람에 해 지금은 발굴마져 하지 못하고 분쟁의 대립만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의 4-5월은 혹서기로 아스팔트를 녹여버리는 고온의 기온이 대지를 달구고 6-9월은 우기로 히말라야를 넘지 못한 고온 다습의 해풍이 대륙의 건조한 바람과 만나 엄청난 양의 비를 뿌린다. 갠지스의 범람이 우연이 아니다.

인도의 4-5월 혹서기는 고온, 6-9월은 고온 다습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린다. 갠지스의 범람이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기후는 인도인들의 생활습관과 삶, 그리고 일상을 정하는데 매우 주요한 변수가 아닐까?

인도인들은 40도를 웃도는 무더위를 이겨내고 나면 도심을 삼키는 홍수,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말라버리는 건기의 가뭄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자연이 남겨주는 것 만큼의 만족으로 삶을 꾸리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갠지스 강변의 몽키 바나나는 홍수를 이겨낸 만큼만 유통되고 퇴적의 쓰레기 역시 대물결의 홍수이다 보니 이를 해결하다보니 방치하는 것 아닐까?

인도인의 무질서 속의 질서, 혼돈과 게으름의 원인이 어디에서 올 것인가에 대한 골몰은 점심시간을 짧게 만들었다.

4일째 마지막 순례지는 인도불교의 상징인 나란다 대학터다.

불교 최초의 최대 대학이다. 인도 고고학회가 밝히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러한 대학이 모두 3개나 되었다니 과히 인도불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찬란했던 인도불교의 번창은 이슬람 회교도들이 침략과 약탈로 인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처참하게 짓밟히고 파괴되었다.

3,000여개에 이르던 사원은 현재 20여개만이 남아있다는 것은 ‘거의 말살에 이른 것이다’해도 무리가 아닌 표현일 것이다.

나란다 대학의 초토화는 인도불교의 멸망을 뜻하다. 그만큼 찬란했고 당대의 불교계 지식인들의 결집처였기 때문이다.

나란다 대학. 이제는 터만 남았다.

나란다 대학의 규모는 길이가 자그만치 10㎞에 이르고 넓이는 900m의 규모이다.

기숙사 한 동에는 32-36명 남짓이 기거하며 지식탐구와 수행을 실천했다. 2개 동에 기거하는 스님은 1개의 법당을 이용해 수행에 정진했다. 대학내부에는 공부하는 법당과 명상실, 화장실, 그리고 공양간 법당, 사리탑 등이 5세기 당대 최고의 불교문화를 창달해온 지식의 보고로써의 역할을 다했다.

학생수 12,000명, 교수스님 3,000명! 이러한 대학이 무려 3개였음은 인도 불교융성을 단박에 점칠 수 있는 가늠자다.

나란다 대학은 한국의 스님도 연을 맺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현장스님께서 이곳 나란다 대학에 입학 명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재 명상실에 들어서니 현장스님 외 2분의 스님의 채취가 묻어났다.

현장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나란다 대학에는 당대 동서고금의 높고 깊은 식견과 지혜를 갖춘자들이 다 모였고 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문지기로부터 구술시험을 거처야만 대학 입학시험 자격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처님 법화경 설법단이 있는 영축산과 나란다 대학은 인도 28개 주 가운데 사회주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비아라주에 위치해 있다. 절대적 원인은 아니지만 체제의 다름으로 인해 비아라주는 매우 가난하다.

이러한 관계로 영축산을 찾아나서는 외국 순례단이 강도를 만나 습격을 당한 사례도 발생했다. 대만의 60여명의 단체 순례단이 나란다에서 바이샬리를 한적한 농촌 여느 철길 건널목에서 습격을 당한 사례는 관광객이나 순례단의 가이드들의 단골 설명 사례로 굳혀져 있다.

실재 석천사 진옥스님의 인도로 인도성지순례에 나섰던 신도들도 비아라주에서 순례단과는 무관한 내부치안문제가 복잡해지자 순례단의 길을 막고 무작정 억류하는 바람에 다음 순례지 호텔예약이 취소되는 낭패를 감수해야 했다.

폭우는 일상이고 범람도 건기 우기의 반복되는 자연현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4일째 일정을 마친 순례단은 내일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부처님의 유마경 설법지가 있는 바이샬리로 향했다.

갠지스 강의 석양을 가슴에 안기위해 열심히 달렸으나 아쉽게도 갠지스의 낙조는 순례단을 허락지 않았다. 이내 기대감과 설레임은 불안과 초초로 변했다. 갠지스강 다리가 병목으로 인해 정체의 연속이라는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순례단이 건너야 할 갠지스강 다리는 인도에서 2번째로 긴 다리, 전장 6.7㎞에 이른다.이름하여 마하트마 간디대교다. 1970년대 초 인도인들이 다리를 건설했으나 보수의 연속이다.

거듭되는 보수공사로 인해 상습적인 정체를 일상으로 여기는 간디대교에서는 일상의 교통질서 찾아보기 힘든 규칙이 지켜지고 있었다, 트럭이 간디대교를 건너기 위해서는 1차선 한 줄로 건너되 차선 바꾸기를 하지 못한다는 그들만의 규칙(?)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규칙적용 덕에 순례단은 예상보다 빨리 5일째 순례를 준비할 바이샬리 숙소에 도착,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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