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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일기(20) 20대엔 맑스를, 30대엔 막스베버를...

또 40대엔 붓다를.... 떠나간 친구를 그리며

  • 입력 2016.08.25 10:15
  • 수정 2016.08.26 17:29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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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윤

고교 동창으로 가깝게 지냈던 복이는 서울의 k대를 갔다. 한 번도 같은 반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중요한 길목에선 자주 마주쳤고, 늘 곁에 있었던 친구다.

생긴 것부터가 투박한 남성미랄까, 하여튼 잘생긴 미남형 얼굴은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이나, 살집도 제법 통통하게 있어서, 씨름 선수까지는 아니어도 농사일이나 노가다판에 나가서 막일을 해도 못할 바 없을 내기처럼 보이는, 속으론 무척 순박한 촌뜨기 같은 친구였다.

이 친구는 방학을 하면 꼭 내려와서 안부를 물었었다.

한번은 내가 형하고 싸우다 한 대 얻어맞아서 눈가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하필 그 친구가 같이 있었다. 그 민망스런 현장에 같이 있었던 죄로 복이는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을 대처하랴, 병원으로 옮기랴, 혼이 났을 것이다.

한마디로 일방적인 봉변이랄 수밖에. 창피하고 미안했던 기억이 그와 내가 나눈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예리하기보다는 정감 있는 친구, 복이가 대학 4학년에 들어섰을 즈음 친구들 모임에 내려왔었다. 그날, 모이면 으레 갑론을박하던 친구들 간의 토론에 말려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나와 복이의 좋았던 관계마저 서먹하게 한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 자기주장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복이가, 사회학을 전공한 학생답게 유독 그날따라 학술적인 용어를 구사해가며 변론을 주도했다. 우린 그런 그를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시대적인 대의를 앞세워 단칼에 싹둑, 그의 주장을 일별해 버리고 말았으니.

“20대에 한번쯤 맑스에 빠져보지 못한 자와 인간과 사회를 논할 수 없다. 하지만 30대에 막스 베버를 알지 못하는 놈과는 지식을 다투지 말라. 그리고 40대에 붓다를 배우지 않는 이들과는 함께 마음을 나누기 힘들 지니.”

담당교수의 말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이 말은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집중적인 공격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야 공감이 가는 이 말을, 나의 팔팔했던 20대에 어찌 소화할 수 있었겠는가.

펄펄 끓는 열정과 날카로운 지성, 따뜻한 인간미를 숭상하고 몸소 따르고자 했던 나와 친구들은 우선, ‘20대에 한번쯤’ 이라는 대목에서 화가 났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한번쯤 맑스주의에 빠져본다, 는 식의 말의 저간의 논지가 어찌 괴이쩍다 하지 않을 손가.

그리고 막스 베버란 또 무언가? 갈등주의 사회학의 대표 격인 칼 맑스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기능주의적 사회학자이다.

그는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자본주의 발전은 병행해야함을 역설하고,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여 경제에 있어 자유주의를 최대한 허용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임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옹호했다.

그가 사회학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역사, 종교에도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학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없어 보이나, 그의 이론과 주장이 체제순응적인 기능적 지식이나 기술을 양산하고 있다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당시의 우리 같은 젊은 래디컬리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일말의 동의도, 용납도 할 수 없었을 터.

게다가 붓다라니, 이제 와서 왠 종교타령이란 말인가. “종교는 인간의 염원이 만들어낸 환상 혹은 관념에 불과하다.” 는 점에 대해서는, 헤겔과 맑스를 잇는 유물론적 철학자, 포이에르 바하가 ‘기독교의 본질’,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강의’ 등의 저술에서, 이미 충분히 변증했던 논제가 아니던가. 불교라고해서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다를 바가 무에 있겠는가.

ⓒ 김자윤

무식하면 용감하다, 고 했던가.

앞 다투듯 날선 공격을 들이대던 우리들의 논박을 당해낼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 그리고 나서 한동안 그 친구는 보기 힘들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만, 행시에 합격해서 중앙정부 몇 곳을 돌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암으로 나이 사십도 채 못 되어 부인과 아이들 셋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말았던 것이다.

그 친구가 자신이 던진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가 떠난 뒤의 여운처럼, 그의 말이 나의 인생에서 화두처럼 떠돌다가, 연못위에 던진 한 개의 조약돌이 파문을 일으키듯 잔잔하나 미묘한 진동의 궤적으로 범람해 와서, 마침내 나의 삶을 통째로 들이키고, 온전히 물들이고 말았음이니.

말의 씨앗, 말의 힘, 말의 업(業)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로 비롯된 동구권 사회주의의 대 격동과 붕괴, 그리고 중국 사회주의의 개량화 등으로 세계체제가 일대 혼란과 변동을 기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리의 민중운동사와 사상계에도 대대적인 변화의 소용돌이를 예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세계사적 대 지각변동이라 할 만한 새로운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고, 그 여파는 엄청났다. 국내의 운동권과 학계, 사상계, 정치권에도 이를 해독하고 수용하는 주체들 간에 다종 다기한 논쟁과 해석을 부르며, 그 대처방법론에 있어서도 빛의 스펙트럼만큼 무성했을 것이다.

민중운동권의 정치세력화, 시민운동의 부각, 환경론자와 생태주의 운동의 부상, 생명운동의 확대, 지방자치와 지역운동의 전면화, 급진적 정치운동의 퇴조, 귀농 귀촌운동의 신사조, 삶의 방식의 전환에 대한 관심의 고조, 그리고 성찰과 반성의 맥락에서 일어난 명상과 영성 운동 지평의 확대 등과 같은.

ⓒ 김자윤

사바세계의 물결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그에 응대하는 나의 노력도 분주했을 것이다.

나에게 세계란 객관적인 사건의 결집체로서가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과 실천의 문제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해야 하는 운동”이라는 당위론으로부터 이제는,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존재론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슈중심의, 객관적인 문제나 제도 개선 위주의, 사고로부터 주관적인 삶의 양식의 문제로의 이동에 무게를 싣게 되었다.

요구형 운동보다는 모범적 실천형으로, 권리 쟁취적 운동보다는 의식의 변환으로, 시스템 개선 위주로부터 주체적 인간과 공동체적 의식으로의, 정치 경제적 관점 위주에서 문화적 생태적 영성적 관점의 도입으로의,

인간과 사회, 우주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패러다임의 대 전환이 요구되고 있었다.

나의 해석은 이러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도외시 하고 있었던 ‘나’의 ‘행복’과 ‘삶’이라는 화두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하여 바야흐로, 그러한 온전한 ‘삶의 방식의 길’을 “지금, 여기에서” 구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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