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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옛 중심지 읍리와 당리

[동행기5] 영화촬영 배경지와 유적지

  • 입력 2016.09.01 20:54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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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봄의 왈츠><여인의 향기> 등의 영화배경이 되었던 당리와 도락리 앞바다 모습
ⓒ 이재언

 

청산면은 신라시대에 읍리에 읍이 설치되었다고 구전되고 있으나 고증할 수 없다. 다만 읍리주변에 고인돌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30년 동안 바다와 섬을 연구하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은 "읍리가 청산도의 옛 중심지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며 그 이유를 말했다.

"읍리 입구에는 20여 기의 고인돌이 있어 청동기시대에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그 이름 자체가 '읍이 설치된 중심 마을'이라는 의미여서 청산도의 원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읍리의 이름이 향교동이라고도 불렸고 고인돌 옆에 '하마비'가 남아 있어 가능성이 더욱 높아요. 하마비란 조선시대에 종묘나 향교 등 권위있는 교육기관 입구에서는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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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리 입구에 있는 고인돌과 하마비 모습으로 읍리에 상당한 세력가가 살았음을 보여준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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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리에 있는 샘으로 윗샘은 활터가 있는 샘이라는 뜻의 '사장샘', 아랫샘은 아래에 있는 샘이라는 '아내미샘'으로 불린다. 수원이 풍부해 살기 좋은 고장임을 알 수 있다
ⓒ 오문수

 

향토사학자 양홍렬... 향토박물관 접근성 좋은 곳으로 이전해야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게 되자 주민들은 군사와 행정에 소홀히 하게 됐다. 지역을 관장하는 별장은 그 원인을 향교의 권위와 유생들의 세력 때문이라고 판단한 후 뭉쳐있는 유생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결속을 와해시켜야겠다며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별장은 청산에서 술 잘 먹고 싸움 잘하는 건달패들을 매수해 향교 근방에 가서 싸우게 하고 술주정을 부린 척 하면서 향교기구와 시설을 파괴해 버리도록 교사 선동했다.

불량배들은 향교의 석가래까지 뽑고 기와도 깨뜨리고 심지어 기둥을 무너뜨리는 난동을 매일 일삼았다. 까닭을 모르는 유생들이 보수를 할 작정이었지만 별장이 벌목을 금지시켰다. 이리하여 향교는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되고 건물은 차례로 허물어져 빈터만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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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복남씨가 그린 읍리 벽화 모습. 기억해야할 경귀가 적힌 벽화가 10여개 된다
ⓒ 오문수

 

읍리를 돌아보면 10여 개 이상의 벽화가 눈에 띈다. 벽화 속에는 평생 기억해야 할 경구들이 적혀있었다. 향토사학자이자 마을 이장인 양홍렬씨에게 벽화를 그린 주인공을 묻자 "마을 주민인 양복남씨"라고 전해줬다.

양씨는 고인돌이 있었던 논둑과 밭두렁에서 옛날 사람들이 버린 그릇 파편과 돌도끼 등의 유물 20여 점을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연대를 측정해본 결과 1500년 전 유물이라는 검증 결과를 들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지만 읍리에도 나이든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농사를 짓지 않는다. 양씨는 농사를 짓지 않아 놀리고 있는 창고를 재활용해보자는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향토박물관을 만들었다.

김상일(전직 청산중학교 미술교사) 교사가 그림을 그린 박물관에는 주민들이 사용하던 농기구 8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접근성이 떨어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한 것을 안타까워 한 양홍렬씨의 얘기다.

"창고가 제습이 안 되고 전시된 자료 대부분이 짚으로 된 제품이라 금방 썩어요. 깨끗하게 새로 지어서 도로 옆 고인돌 공원과 향우동산 인근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관광객들에게  선조들이 사용했던 유품들을 보여주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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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사학자이자 읍리 이장인 양홍렬씨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들에게 고인돌 주변 논둑과 밭두렁에서 주은 그릇 파편과 돌도끼 등의 유품을 설명하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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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조미라씨가 읍리의 향토박물관을 안내하며 논밭을 가는 '써레' 사용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 오문수

 

영화의 배경이 된 당리

청산도 소재지인 도청리에서 동남쪽으로 1㎞ 쯤 달리면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마을 당리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탐진현(현 강진군)에 속했던 청산도 당리에 면사무소가 설립된 해는 1896년이다.

'당리'라는 이름은 '당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차에서 내려 소나무에 둘러싸인 집이 있는 곳으로 100여 미터쯤 올라가면 봉긋 솟은 고분과 당집이 나온다.

안내문을 보면 청해진 장보고대사의 부하로 청산도를 다스리던 한내구 장군의 묘라고 한다. '청산을 지키고 있던 장군은 활과 칼, 창 등 무술에 뛰어났으며 마을 주민에게 교학과 농어업을 장려하였다'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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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집 모습으로 안내문에는 장보고 대사의 부하로 청산도를 다스리던 한내구 장군의 묘라고 씌어져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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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한 지 2~3년이 지나 육탈이 된 후 정식으로 매장하는 장례 풍습인 초분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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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리 주변에 복원된 청산진성 모습
ⓒ 오문수

 


당집 바로 아래에는 복원된 초분이 있다. 초분이란 사망한 지 2~3년이 지나 육탈이 된 후 정식으로 매장하는 장례양식으로 시신을 짚 이엉으로 덮어둔 임시 가묘다. 청산도에는 초분뿐만 아니라 풍장도 있었다고 한다.

왜구가 자주 침략하자 조선은 1681년(숙종 7)에 청산진성을 쌓았으나 세월이 흐르며 무너졌다. 근래 들어 당국에서는 당집이 있는 언덕에서 당리쪽으로 청산진성을 복원했다. 원래 쌓았던 성은 높이가 15척, 길이 10리에 달했고 성내 인구가 2500명을 넘었다고 한다.

나이든 사람들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를 기억할 것이다. 영화 속 소리꾼 유봉(김명곤)과 의붓딸 송화(오정혜)는 당집에서 남서쪽 경사진 밭을 따라 펼쳐진 돌담길을 따라 덩실덩실 춤추며 진도아리랑을 열창했다.

이후 <봄의 왈츠>, <여인의 향기> 등을 촬영하며 청산도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청산도는 예로부터 '신선이 사는 섬'이라는 '선원도'라 불렸다. 여행의 계절 가을에 청산도를 찾아 신선이 되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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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은 김유 선생이 선정한 청산팔경을 촬영하기 위해 4년 동안 7860장의 사진을 찍어 8장을 완성한 김광섭 사진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청산면지에도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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