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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와 같은 삶을 살자

우리의 삶은“만남”이 아니라 “만나자”이다.

  • 입력 2016.09.14 09:32
  • 수정 2016.09.14 10:26
  • 기자명 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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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자윤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동사’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유인즉 삶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삶을 노예처럼 살기보다는 주인처럼 살길 원한다. 이유인즉 주인은 자신의 생각대로 이 세상을 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장자의 일화를 살펴보자. 초나라의 위왕은 장자가 매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신하로 하여금 재상자리를 간청하게 한다. 그러나 장자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명사’ 같은 갇혀있는 삶이 싫어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금은 아주 큰돈이고 그리고 당신이 제시한 재상 자리도 아주 높은 자리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교제에 제사 지낼 때 올리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우린 장자가 거절한 재상자리와 소의 삶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교제는 천자가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게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 천지신명께 고하는 왕의 제의식(祭儀式)은 진실함보다는 간절함이 숨어있다. 그렇기에 정성을 다 할 수밖에 없다.

교제를 지낼 때 소를 잡아 올려야 하는데, 왕은 그동안 소에게 지극 정성을 다한다. 매일 좋은 풀을 먹이고 깨끗한 물로 온몸을 씻기며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힌다. 그러면 당연히 소는 정말 대접을 잘 받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해 할 것이며 다른 소에게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런데 제의식(祭儀式)이 점점 다가오면 서서히 소는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소는 한탄한다.


“나는 동사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명사 같은 삶을 살았다”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동사 같은 삶과 명사 같은 삶은 무슨 의미일까?
개념 속에 제한되어 자율성을 상실한 삶이 명사 같은 삶이라면, 세계와 접촉하며 스스로 꿈틀거리면서 사는 삶이 동사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따뜻한 손을 잡아주는 행위가 의미가 있다는 말이며,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던지기 보다는 함께 움직이며 느끼는 감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득 장자의 음성이 들려온다.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진흙탕에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그런 삶을 살지, 천하에 얽매이는 그런 삶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결코 무늬만 화려한 삶을 삶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만남”이 아니라 “만나자”이다.
개념 속에 제한된 명사 같은 삶을 살지 말고, 끝없이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동사 같은 삶을 살아야한다. 고립되어 소통할 수 없는 죽어있는 언어를 선택하기보다는 살아있어 움직일 수 있는 꿈틀거리는 언어를 택하는 것이다.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는 가장 낮다. 울타리는 모두 길이다.”

함민복 시인의 ‘섬’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섬처럼 폐쇄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 개방적인 삶을 살아보자.

이제 현실의 모든 사건과의 대면에서 나만의 욕망과 나만의 행동으로 통!통!통! 온몸으로 느껴보면 어떨까.

 ⓒ 김자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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