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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 "나서지 말라"는 교육을 하는 이유

'여순사건' 진상 규명 위해 여수 찾은 송영길, 박주민 의원

  • 입력 2016.12.08 13:11
  • 수정 2016.12.13 16:47
  • 기자명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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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더불어 민주당 송영길, 박주민 의원이 여수만성리에 위치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설명을 듣고 있다.

지난 6일 오전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박주민 의원이 여순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와 '형제묘'를 찾았다.

두 의원은 전날 밤 8시 여수 종화동 카페베네에서 열린 시대공감 토크 '세월호와 최순실을 말한다'에서 권력자의 부패에 따른 세월호와 박근혜 정부를 향한 시민들과 분노의 목소리를 주고 받으며 정권교체를 다짐했다. 앞서 언론에선 두 의원이 '여순사건특별법 제정 공동발의에 나섰다'며 이들의 행보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 두 의원은 "언론이 너무 나갔다"라고 말했다.

이승만판 5.18, 세월호에 비유되는 여순사건

▲ 1948년 10월 23일,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군이 투입됐다. 해군 LST함이 여수앞바다 선상에서 시내를 향해 무자비한 박격포 공격을 하자 여수시내가 불타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도 출동 거부를 기점으로 1955년 1월 23일까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4.3사건 투입을 앞둔 14연대는 동족상잔 절대 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출병을 거부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정부군에 진압됐다.

이후 사건이 커졌다. 여수를 진압한 진압군은 10월 27일부터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악명 높은 제5연대 김종원 부대는 종산초(지금의 중앙초)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즉석에서 일본도로 시민들의 목을 쳐 죽였다. 또 좌익색출이란 미명하에 우익들이 손가락 총으로 가담자를 지명하면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했다.

오동도 동쪽 무인도(속칭 애기섬)에선 국민보도연맹원 110명이 총살당했다. 남면 안도에서도, 거문리 해안가와 인근 무인도에서도 총살당했다. 당시 헌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는 200여명이었다.

만성리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여순사건 부역혐의자로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된 사람들 중 125명이 살해당했다. 증언에 따르면 5명씩 묶어서 총살한 후 장작위에 5명을 겹겹이 쌓아 5층으로 다섯 묶음을 만들어 화장시켰다. 당시 만성리 마을 주민들은 인육 타는 냄새로 곤욕을 치렀다 한다.

이들 희생자들의 묘엔 형제묘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생된 시신들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같이 있으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여수의 아이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남들 앞에 나서지 말라"는 가정 교육을 받고 살았다. 여순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14연대 주둔지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이승만판 광주사태'에 비유된다. 지금의 세월호 사건에 비유하면 무리일까?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미신청자, 사건 이후 멸족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수가 2천여명을 넘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이후 특별법 제정이나 보상, 사과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수시도 조례제정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여순사건 전문가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은 좌익으로 몰린 종북의 원조였다"면서 "이 사건이 국가보안법이 생긴 계기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날 송영길. 박주민 의원은 만성리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에 도착해 묵념을 올렸다. 이들은 위령비문에 아무런 글씨도 새겨지지 않은 것을 신기해했다. 비문 뒤에는 단지 '1948년 10월 10일 .... '이라고 비문을 세운 날짜만 달랑 적혀 있었다. '지금껏 아무것도 진상규명된 것이 없다'는 의미를 담은 묵언의 시위다.

조례제정 시급한 여순사건...시장이 나서라

▲ 6일 더불어 민주당 송영길, 박주민 의원이 여수 만성리에 위치한 여순사건때 희생된 125명이 묻힌 형제묘를 찾았다. 비문 뒷면에는 여순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가족이 또다른 피해를 우려해 비문을 덮어 버렸다.
▲ 6일 더불어 민주당 송영길, 박주민 의원이 여수 만성리에 위치한 여순사건때 희생된 125명이 묻힌 형제묘를 찾아 주철희 박사로 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주철희 박사는 "지역민의 아픔을 풀기 위한 진상규명에 대해 여수시장님이 의지만 있다면 조례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아무런 의지가 없다"면서 "여수지역을 벗어나 여순사건은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 등 전라도민들의 피해가 많기에 기초단체장과 전남도에서 조례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주 박사는 이어 "제주4.3사건의 진상을 밝힌 것은 제주도의회에서 조례를 만들어 조사에 임한 뒤 국가에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면서부터였다"면서 "여수시의회와 시장이 먼저 조례를 제정해 피해조사에 나선후 이낙연 도지사가 나서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이후 125명의 원혼이 잠든 '형제묘'로 이동했다. 이곳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처음 유골 발굴을 시도한 곳이다. 유골을 모실 합동추모장이 없어 발굴된 유골은 충북대학교 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에 보내져 방치됐고, 이후 발굴은 중단됐다. 묵념을 마치고 주철희 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형제묘 비석 뒤에는 슬픈 사연이 담겼습니다. 아들이 처형된 것을 어머니가 숨어서 목격합니다. 비석에 보이는 '이정 최문자 쓰다'라는 마지막 글씨만 달랑 남았습니다. 비석에는 원래 이 사건과 관련된 사연이 적혀 있었어요. 희생된 아들 박채영 후손들이 비석을 세우고 난 후 가족들이 피해를 볼 것을 두려워해 비문 뒤에 쓰인 글을 보이지 않게 메워 버렸습니다. 메운 것만 뜯으면 비문 내용을 볼 수 있지요."

여순사건 철저한 진상규명 필요..."특별법 발의해야"

▲ 6일 더불어 민주당 송영길, 박주민 의원이 여수 만성리에 위치한 125명이 희생된 형제묘 입구 현판을 쳐다보고 있다.
▲ 여순사건 위령비에 추념후 한컷. 좌측부터 주철희 박사, 박주민 의원, 송영길 의원, 정한수 목사, 박정영 원장의 모습

여순사건 특별법 공동발의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송 의원은 "아직 공동발의 한다고 발표한 적은 없다"면서 "오늘을 계기로 직접 지역민의 아픔을 느껴보고 구체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 왔다"면서 "여수지역 의원님들과 상의해보고 함께 고민하겠다"라고 답했다.

박 의원은 "제주 4.3사건은 처음 알려진 것과 다르게 진실이 규명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면서 "여순사건도 4.3 사건과 같이 처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라고 전했다.

이어 국정교과서에서 여순사건이 '반란'으로 기록된 것을 묻자 송 의원은 "제주도 마찬가지로 여순도 '사건'으로 표명하면서 역사 평가에 한 획을 긋기 위해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객관적으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면서 "좌우 대립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해 신혼(한을 푸는 것)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또 박 의원은 "철저한 진상규명이 있게 된다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도 자연스럽게 정확하게 왜곡되지 않게 이뤄질 것이다"면서 "진상규명 자체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사건에 대한 규명이나 신혼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다. 진상규명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두 의원은 이어 "제주도민들이 하나로 힘을 모아서 노력해온 것이 축척돼 4.3에 대한 억울함이 풀리고 4.3사건 관련자들도 그동안은 죄인처럼 숨어서 지냈는데 억울함이 해소되고 누명을 벗게 된 계기가 되었다"면서 "여수, 순천도 전남도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신혼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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