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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도인의 모내기 판

귀농일기(9)

  • 입력 2017.01.07 09:45
  • 수정 2017.01.07 15:59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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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자윤

염색도인 토벽형은 능주골에 산다.

콧수염과 턱수염에다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리고 작달만한 체구에 염두를 두지 않은 채, 그의 눈매를 한번 보기만 해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이 양반의 재주다.

농부는 자고로 자급자족을 해야 된다는 게 염색도인의 심오한 개똥철학에서 나온 지론이다. 기본적으로 촌에 살려면 집짓는 일부터 손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운다. 그리고 이 양반은 자기 집도 온갖 자재를 아끼고 얻고 재활용하여 직접 설계해서, 손수 망치와 톱을 들고 완벽하게 다 지어냈다.

벼농사는 기본이고, 밀이니 수수니 콩이니 팥 등의 잡곡류와 고추니 고구마니 감자 등의 채소류도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내가 토종닭 암수 한 쌍을 분양받아온 것도, 어성초 몇 뿌리를 구해온 것도 다 이 집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산속의 자생 찻잎을 채취해서 차를 덖어 만드는 솜씨 하며, 황토와 감물은 기본이고, 그 어렵다는 홍화, 쪽, 양파, 댓잎 등의 염색 기술을 직접 개발하고 보급함으로써 훗날 천연 염색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그의 다재다능한 이런 천품으로부터 나왔을 것이었다.

그날은 염색도인의 모내기 날이었다. 지금이야 트랙터로 갈아서 이앙기로 일사분란하게 심고 말면 그뿐이나, 나의 귀농 초보 시절엔 그나마 전동적인 모내기 장면을 구경할 수 있는 풍경이 간간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내 어렸을 적 기억에 의하면 그중 가장 기술이 선 어린 친구들이나 혹은 연로하신 노인들이 논두렁 양쪽에서 못줄을 뗀다. 군대식으로 하면 아직 초보 쫄다구나 최고참 정도가 되어야 못줄을 잡을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못줄잡이가 그리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허리를 펼 경황도 없이 하루 종일 논바닥에서 기는 모잽이 보단 그 강도가 덜할 순 있겠지만, 나름 수월찮은 일이다. 나의 경험으로도 못줄잡이가 모잽이보다 딱히 더 나은 것이라고 쉬이 말할 순 없다.

하여튼 기계모가 이미 보편적으로 보급되었던 그 당시에 손모를 고집하며 죄없는 우리 논두렁건달들을 모내기에 징집해 들이는 염색도인에 대해 내심 불평불만이 없지 않았을지라도, 겉으로는 고까운 내색 없이 모두 태연하게 모여들었다. 인근지역 귀농자들의 도타운 우의를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다는 각오로 임한다.

아마 빈목이 무등산 동쪽으로 귀농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의 입장에서도 그자가 첫 번째 조우에서 보여준 예의 그 칼칼하고 잘난 체 하는 인상과 목소리에 친숙해질 시간이 다소 필요했을 것이나, 논두렁건달의 인연이란 참으로 간단치 않은 어떤 것이리.

무논에서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일삼다 보면, 한식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각기 다른 이력과 천품의 소지자들이라, 어느 한 사람인들 하늘 아래 귀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하고많은 인연들 중에서 어이하여 논두렁의 인연으로 서로를 벗하며 어깨를 걸 수 있었겠는가.

빈목은 그날을 비롯하여 여지껏 인생의 강을 건너가는 벗이자 도반으로, 가장 오랜 인연으로 내게 들어왔던 것이다.

동갑내기로, 같은 지역에서 자랐고, 같은 대학교를 다녔으며, 치열했던 팔십 년대와 민주화 투쟁의 긴 터널을 통과해온 이력도 같아서, 동시대의 아픔과 정신을 차별없이 공유했다.

한편, 이 자는 말끝마다 ‘해탈’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의 모든 논리의 알파와 오메가는 ‘해탈’이었고, 때문에 듣기에 따라선 몹시 낯이 선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나 깨나 해탈 타령에 날 새는지 모를 지경이 되니, 해탈 바이러스는 날이면 날마다 부딪치는 술잔을 통해서, 그리고 구수한 입담과 살벌한 토론을 통해서, 귀농건달들의 무의식 속으로 부지불식간에 파고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전직목사의 이력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그의 입에서 입만 열면 주문처럼 튀어나오는 ‘해탈’이란 말의 생뚱맞음이라니.

아떻든 열린 가슴의 건달들에게는, 외려 ‘해탈’이란 일종의 설은 말이 주는 뉘앙스에서 모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짊어지고 있을 법한 여하한 고통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절실했던 까닭에, ‘해탈’의 언어를 우산 삼아, 그 언어적 우산의 그늘 속에 숨어들어가고픈 어떤 충동질이 이들 건달들의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  김자윤

해탈 말고도 빈목이 계급장처럼 붙이고 다니는 신화가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80년 당시에 오일팔 민중항쟁의 총잡이로서의 화려한 이력이었다.

느그들은 모를 것이여, 그러니까, 80년 5월 27일 새벽, 그 역사적인 순간이었단 말이지.

눈을 게슴치레 뜨고 건달들을 내려다보며 연설하는 폼이 영락없이 전두환이 지금 제 앞에 혹 무릎이나 꿇고 있고, 그리고 지금 같이 둘러앉아 있는 건달들은 마치 자기 수하나 되는 냥, 사뭇 위세가 당당한 모습이었다.

아, 이 도둑놈들이 글쎄 그날 새벽에, 그러니까 말이야, 한 서너 시나 되야부렀을까, 탱크, 장갑차, 헬리꼽터들을 허벌라게 동원해 갖고 마치 광주시민들을 싸그리 죽여뿔 기세로 시내 진입을 개시했더란 말이여.

오일팔 얘기만 나왔다하면 아무리 천하없는 건달들이라도 그 앞에선 주눅이 들고 만다.

그날 새벽에 말이지, 음, 그러니까, 시민군의 마지막 보루는 본부로 삼고 있었던 도청하고, 그리고 와이더블류씨에이가 아니었겄는가, 난 와이를 사수하고 있었지, 아 근디 올 것이 와불드라고이, 그 적막강산이던 새벽하늘에 왠 불벼락이 떨어지는디,

하, 그노메 헬리꼽터 소리가 타타타타타 이렇게 새벽공기를 뒤흔드는데, 아, 정말 기가 막혀서 어떻게 말도 할 수 없더라고이, 느그들은 몰라, 암, 모르고말고,

러다가 갑자기 기관단총 소리가 사방간데서 따다다다다, 쏟아져불데이, 눈이 핑핑 돌더랑께잉, 귓구멍은 터질라고 허제, 정신이란 놈은 혼비백산해갖고 인자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겄제, 잠깐 나갔던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옆에서 픽픽 쓰러지는 동지들이 생겨뿔고....,

그러다가 기어이 그날의 상황이 재연되기라도 한 듯, 먹먹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히면서 말을 잇지 못 하였다.

빈목은 상무대 영창에 끌려가서 육 개월을 살았다고 했다. 군인들한테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는데, 자기가 지금 안 죽고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고도 했다.

그리고 자기는 거기 상무대 영창에서 성경이란 것을 생전 처음 보았고, 그때 발견한 예수라는 싸나이에 반해 인생을 걸어버리게 되었노라고 밑도 끝도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소 멋쩍은 빈목의 간증 탓에 모처럼만에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건달 대중의 낯빛이 붉어져 있었다.(계속)

[편집자 소개글]

편지를 보낸 민웅기는 전 여수YMCA총무였다.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의했으며 현재 무등산 인문학당 강사다. 「태극권과 노자」저자이고, ‘무위태극선’,'송계선원' 대표이다. 송계선원은 노자와 장자,공자와 맹자,원효와 최수운의 삶과 지혜를 공부하고, 태극권과 명상 등을 수련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최근에는 장자 탈고를 마쳤다. 기존 번역서나 주석서와는 달리 장자 사상을 산책하듯이 풀어서 독자에게 알기 쉽게 필자만의 감상방식으로 저술했다. 본지에서는 ‘청춘일기’를 마치고  ‘귀농일기’로 연재중이다.  이후 ‘수행일기'까지 연재를 마치면 책으로 엮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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