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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배 타고 울릉도까지 500km 넘게 간 초도 사람들

개척정신과 독립운동가들 포함 3천여명 살았던 초도...신입생 없어 네 학교 모두 문 닫아

  • 입력 2017.01.17 09:53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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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론으로 촬영한 초도 모습
 드론으로 촬영한 초도 모습
ⓒ 오문수

 


섬전문가 이재언씨와 함께 초도를 방문했다. 풀이 많은 섬이라 해서 명칭이 붙은 초도(草島)는 여수시 삼산면에 속하는 섬으로 여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67㎞ 떨어져 있어 여수와 제주의 중간에 위치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지질은 중성화산암류와 소량의 불국사화강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중앙에 위치한 상산봉(339m)은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이지만 경사는 완만하다. 공중에서 바라본 초도 해안은 거북이를 닮아 돌출한 갑(岬)과 깊숙한 만(灣)이 교대해 해안선이 복잡하다. 동쪽과 남쪽의 일부 해안에는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1월 평균기온은 2.1℃, 8월 평균기온은 24.7℃, 연강수량은 1247㎜이다.
 

 의성리 주민인 이언조(64세)씨가 여수시내에 다녀온 부인을 마중나왔다. 부인은 제주출신 해녀로 초도에 물질하러 왔다가 이씨를 만나 결혼했다. 맨오른쪽은 섬전문가 이재언씨다
 의성리 주민인 이언조(64세)씨가 여수시내에 다녀온 부인을 마중나왔다. 부인은 제주출신 해녀로 초도에 물질하러 왔다가 이씨를 만나 결혼했다. 맨오른쪽은 섬전문가 이재언씨다
ⓒ 오문수

 


취락은 대동마을을 중심으로 해안가의 만입부에 예미·의성·경촌·진막·정강마을 등이 형성되어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 0.16㎢, 밭 1.56㎢, 임야 5.19㎢이다. 주민들은 어업보다 농업에 주로 종사한다. 벼농사는 미약하나 마늘·감자·보리·콩 등의 산출이 많아 식량의 자급률이 높으며, 돼지·닭·염소·소가 많이 사육된다. 근해에는 문어·삼치·방어·감성돔 등이 어획되며 톳과 미역 양식도 활발하다.

한때 3천명이나 됐던 섬은 요즈음 450여명이 살고 대부분은 고령자들이다. 초등학교 3개, 중학교 1개가 있었던 학교는 신입생이 없어 폐교됐다. 취학할 신입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여수시내에 집을 사둔 학부모가 학생 1인당 40만원의 보조금을 받고 여수시내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주민들 노력으로 수력발전소를 세운 진막마을
 

 수력발전소(1976년)까지 만들어 전기를 공급했던 진막마을 모습. 작은 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수력발전소(1976년)까지 만들어 전기를 공급했던 진막마을 모습. 작은 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오문수

 


섬치고는 물이 많아 논농사까지 지었던 섬마을에는 자그마한 수력발전소까지 있었다. 1976년 6월 23일에 <동아일보> 정기면 기자가 쓴 "삼산면 초도리 낙도를 밝힌 수력발전"이라는 기사에는 진막마을 박정남씨의 노력으로 수력발전소를 세운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다. 

여느 어촌과 마찬가지로 초라한 진막마을 사람들은 밝은 전기불 밑에서 생활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던 중 박정남 (당시 53)씨가 우연히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가 1년 내내 한 번도 끊기지 않고 펑펑 쏟아져 흐르는 계곡물을 보고 이 물을 수력발전에 이용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을회의에서 공동발전소를 세우자고 뜻을 모은 주민들은 기금을 모으고 군의 지원을 받아 2년만에 시간당 80kw의 전기를 생산했다. 박씨의 공로 때문일까? 동네에는 박정남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물이 풍부해 수력발전소를 세웠던 자리를 가리키는 진막마을 박우건씨. 이곳을 막아 200m에 달하는 수도관을 통해 바닷가 절벽아래에 있는 곳에서 낙차를 이용해 80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물이 풍부해 수력발전소를 세웠던 자리를 가리키는 진막마을 박우건씨. 이곳을 막아 200m에 달하는 수도관을 통해 바닷가 절벽아래에 있는 곳에서 낙차를 이용해 80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 오문수

 


지금이야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대부분의 섬에 발전소가 설치되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박우건(55세)씨의 얘기에 의하면 "한집에 전등 2개만 허용되고 밤 11시면 전기공급이 중단되었지만 장마 때면 연장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진을 쳐 '진막'이라 불렀다는 진막마을 앞바다에는 사리 때면 걸어 다닐 수 있는 안목섬이 있다. 섬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기쁨은 시골인심이 살아있다는 것. 진막마을을 안내한 박우건씨는 바쁘다면서도 의성리까지 차를 태워다줬다.
 

 의성리 바닷가에서 돌김을 채취하는 주민
 의성리 바닷가에서 돌김을 채취하는 주민
ⓒ 오문수

 

 

 의성리 바닷가에 있는 동태샘 모습. 일제강점기 시절 몹쓸 피부병에 걸린 김동태라는 사람이 이 샘가에서 3년 동안 기거하며 샘물로 목욕한 후 완치됐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의성리 바닷가에 있는 동태샘 모습. 일제강점기 시절 몹쓸 피부병에 걸린 김동태라는 사람이 이 샘가에서 3년 동안 기거하며 샘물로 목욕한 후 완치됐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 오문수

 


의성리 바닷가에서 돌김을 채취하던 노인 한 분이 동태샘을 가보라고 권한다. 샘 옆에는 동태샘 유래가 기록돼 있었다. 1931년 김동태라는 사람이 일본 명치대학을 다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에 걸려 일본에서 각종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아 찾아온 곳이 이곳 옹달샘이었다.

당시 3년여 동안 이곳에서 거적으로 천막을 치고 옹달샘물로 목욕하며 생활한 뒤에 완쾌되었다고 하여 이 사람 이름을 본따 동태샘이 되었다. 마을주민들은 몸에 부스럼 등 피부병이 발생하면 이 샘물을 마시고 목욕 후 수일내에 말끔히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마셔보니 겨울인데도 차갑지 않고 물맛도 좋았다.

개척정신으로 무장하고 독립운동까지 했던 초도주민들
 

 드론으로 본 의성리 모습
 드론으로 본 의성리 모습
ⓒ 오문수

 


의성리 바닷가에는 귀중한 사료가 적힌 석조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는 "1882년 임오년 이전부터 목숨 걸고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여 영토를 확보한 선각자들이 사셨던 흥양현 초도사람들", "일본에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활약하신 김성택, 이병현 의병이 사셨던 초도의성!"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흥양현은 고흥을 말한다.

당시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은 낡은 풍선을 타고 바람과 해류를 이용해 울릉도까지 가서 새로운 배를 만들어 타고 해산물을 채취한 후 삼산면으로 귀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수에서 쾌속선을 타고 초도까지 가는데 2시간여가 걸리는 데 돛단배를 타고 울릉도까지 목숨 걸고 왕복한 뱃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며 고개가 숙여졌다.  

1934년 2월 24일에 <동아일보> 송기찬 기자가 쓴 "우산국의 옛자취"란 기사 일부를 발췌했다. 기사내용을 살펴보면 울릉도에 눈이 많이 내려 재앙을 당했던 것 같다.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맞춤법은 현대식으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게재했다.

"교통상으로는 아조 딴 세상의 느낌을 주고 경제적으로는 거의 파멸에 직면하야 모처럼의 평화향이 무색하게 되는 눈의 울릉도는 과연 어떤 과거를 갖인 곳? 이제 묵은 책장에서 뒤저본 이 섬은 신라시대에 '울섬'이라 부르는 곳. 일본에서는 죽도, 송도라고도 불릿다고도 한다.
 

 울릉도를 오가며 활동했던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의 기록이 적힌 석조기념비 모습. 삼산면 주민 115명이 울릉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왼쪽에는 독도가 우리땅임을 알 수있는 고종의 칙령이 붙어있다
 울릉도를 오가며 활동했던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의 기록이 적힌 석조기념비 모습. 삼산면 주민 115명이 울릉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왼쪽에는 독도가 우리땅임을 알 수있는 고종의 칙령이 붙어있다
ⓒ 오문수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란 섬나라, 그후 고려 초기로부터 수백년간은 북방의 나라 여진, 금등이 침노한 바 되어 인민이 각지로 피하야 마침내 무인도로 되었고 고려말년부터 이조의 초기까지 해적근거지 이던 것을 태종이후 토벌을 하엿섯는데 뜻밖에 일본에서 섬의 소속문제가 일어나 내종에는 조선, 일본, 명의 삼국무역항으로 하자는 일본칙의 제의까지 잇어 이리저리 해결을 짓지 못하고 끄을기 50년 동안 일본 산음 지방의 어민들만이 드나들며 이익을 거두어 왓다는 바.

소속문제가 일어나기 세 번 만에 김옥균 등의 교섭으로 한국정부의 소속이 되고 일본어민이 드나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명치 17년에 울릉도 개척령이 발표되고 동시에 판선도장을 두었으며 울진, 경주 등 일곱 고을 사람들이 뒤를 이어 들어왔다. 이보다 먼저 이 섬에 드나들기 시작하기는 전라도 사람들로 초여름에 헌배를 타고 들어오면 왼여름을 울창한 산림속에서 좋은 재목을 버이어 새 배를 지어 타고나오는 것인데 이 섬의 개척항은 지금의 현포동.

밭도 갈지 못하고 논도 이룰 수 없는 이 섬의 개척에는 바다에서 전복을 따고 산에서 깍새를 잡으며 칙갈을 캐어서 배 채우게 되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원시생활이었던 것이다"

기념비 아래에는 2007년 2월 28일에 발행된 <울릉군지> 내용과 초도와 거문도주민 115명이 울릉도에서 활동했던 기록이 있다. 기념비 왼쪽에는 '바위섬, 독섬을 석도라는 명칭으로 광무황제(고종임금)가 1900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한제국칙령 제41호가 붙어있었다. 칙령 1·2조 내용이다.

제1조)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은 5등으로 할 사.
제2조) 군청 위치를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 할 사. 

      
의성출신 독립유공자인 김성택과 이병현열사는 일제가 정미 7조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해산하자 황준성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활동을 했다. 그들은 청산도와 여서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거두다 체포되어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소득사업을 창출해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섬을 만들어야
 

 대동리 인근 예미마을 밭에 서있는 허수아비 모습. 초도가 예뻐 지구별을 떠나지 못한 ET가 서 있는 것일까?
 대동리 인근 예미마을 밭에 서있는 허수아비 모습. 초도가 예뻐 지구별을 떠나지 못한 ET가 서 있는 것일까?
ⓒ 오문수

 

 

 예미마을 골목길 모습으로 옛모습 그대로의 정취가 남아있다
 예미마을 골목길 모습으로 옛모습 그대로의 정취가 남아있다
ⓒ 오문수

 

 

 예미마을에 있는 문어통발 모습이 정겹다
 예미마을에 있는 문어통발 모습이 정겹다
ⓒ 오문수

 


초도 섬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을 들여다보면 무너져가는 기와집과 살림도구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지도검색을 통해 초도에서 울릉도까지의 거리를 재보니 500㎞를 훨씬 넘는다. 개척정신으로 무장해 한 때 돛단배를 타고 울릉도까지 왕래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섬은 쇠락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가고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진막에서 만났던 박우건씨의 얘기가 귓가를 맴돈다.

"요즈음은 섬에도 웬만한 기반시설이 되어있어 사는데 큰 문제는 없어요. 소득사업이 있어야 젊은이들이 되돌아옵니다.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섬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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