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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한 안내자가 훌륭한 길잡이를 만든다.

  • 입력 2017.01.20 22:50
  • 수정 2017.01.22 22:50
  • 기자명 곽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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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들은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과거 교양과 지성을 쌓기 위한 학문의 전당이었던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학원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아서 취업을 하는데도, 기업체의 인사담당자들은 취업자들이 문제 해결 능력과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교육은 국가의 ‘百年之大計’라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교육은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수단입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해 시험에서는 좋은 성과를 얻지만 실제문제 해결 능력은 부족한 것이 한국 교육의 현실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배워야 할까요? 옆 사람이 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한다면 흔히 보는 옆 사람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을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평하였고, 또한 수많은 제자를 기른 훌륭한 교육자였습니다. 공자에게서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할지 들어보겠습니다.

  子曰 “不憤 不啓, 不悱 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則 不復也.”「술이(述而)」

  선생님 가라사대 “알고자 애태우지 않으면 알려주지 알았고, 표현하고자 안타까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았다. 한 귀퉁이를 들어 보였는데 다른 세 귀퉁이로 대구하지 않으면 다시 알려주지 알았다.”

  짧지만 교육 방법의 핵심을 잘 드러낸 구절입니다. 憤(분)은 답답해서 애태우는 모양이고, 悱(비)는 알고는 있지만 표현을 못해 안타까워하는 모양입니다. 啓(계)는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로 알고자 하는 것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고, 發(발)은 알 듯 말 듯 하여 정확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할 때, 핵심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핵심을 알려주더라도 낱낱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고는 거기서 유추해서 상응하는 다른 증거들을 들이대기 기다렸고, 만약 들이대지 못하면 더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子曰 “不曰 ‘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위령공(衛靈公)」

  선생님 가라사대 “‘어찌 할까? 어찌 할까?’하고 스스로 자문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 할 수가 없구나!”

  이 구절은 어려운 말은 없지만 스스로 궁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선생이라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배움의 핵심은 본인이 알고 싶어 애태우고, 정확히 알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알고 싶어 애태워야 선생님은 비로소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었고, 알 듯 말 듯 한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정확한 지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알려주더라도 낱낱이 알려준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려주고는 다른 것을 유추하여 스스로 터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즉 공자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선생님은 매우 불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은 너무나 친절한 안내자인 듯합니다. 행여 뒤쳐질세라 자기 생각을 한글로 채 표현도 하기 전에 영어를 가르치고, 중학교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고등학교 과정을 앞당겨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안내자들이 한눈팔지 못하도록 손을 잡고 끌거나 업어서 사회생활의 출발점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그래서 막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회에 나가서야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한국사회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배움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배움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내자가 불친절할 때 길을 걷는 사람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갑니다. 배움을 강요하지 않을 때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고 필요한 것을 배워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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