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조명연합수군이 머물던 전진기지, 이리 방치해서야...

장도 이주민들...바다에 나가 호미로 파면 돈이었는데

  • 입력 2017.01.23 16:47
  • 수정 2017.01.24 08:54
  • 기자명 오문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장도모습으로 오른쪽에 볼록 솟아오른 산이 장도이다. 인근 왜교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쳐부수기 위해 싸웠던 조선,  명나라 수군과 일본수군이 격전을 치른 현장이기도 하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율촌지방산단, 광양국가산단, 여수국가산단의 중심에 있는 섬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장도모습으로 오른쪽에 볼록 솟아오른 산이 장도이다. 인근 왜교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쳐부수기 위해 싸웠던 조선, 명나라 수군과 일본수군이 격전을 치른 현장이기도 하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율촌지방산단, 광양국가산단, 여수국가산단의 중심에 있는 섬이다.
ⓒ 오문수

 

노루를 닮은 섬 장도를 방문했다. 1500년 경 장성에서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입도하였다고 전해지는 장도는 여수시 율촌면사무소에 동북쪽으로 2.17km 거리에 있다. 섬의 모양이 노루를 닮아서 '노루섬'이라고 불리던 것을 노루 장(獐) 자를 써서 '장도(獐島)'로 바꾼 섬 남쪽에는 송도, 대륵도, 소륵도가 있다.

장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의 섬으로, 최고 지점 88m를 중심으로 경사가 심한 편이며 섬 주위에는 간석지가 발달했었다. 면적 0.4㎢에 수백 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유인도였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을 겸했으며, 주요 농산물로는 마늘·보리 등이 생산된다. 수산물은 바지락과 꼬막 등을 양식했다. 이곳은 원래 섬이었으나 지금은 율촌제1산업단지 매립 공사로 육지가 되었고 장도에 살던 사람들은 1998년 율촌면 월산리 일대로 이주하였다.

조선과 명나라, 왜의 3국 수군의 격전장이었던 장도

 

 

 

 

 

 

 

 

 드론으로 촬영한 장도 모습. 산업단지에 둘러 싸이기 전 어패류의 보고였다
 드론으로 촬영한 장도 모습. 산업단지에 둘러 싸이기 전 어패류의 보고였다
ⓒ 오문수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진 여동리 앞바다에는 자동차 바퀴가 세워져 있었다. 물에 비친 바퀴구멍이 8자를 그렸다.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진 여동리 앞바다에는 자동차 바퀴가 세워져 있었다. 물에 비친 바퀴구멍이 8자를 그렸다.
ⓒ 오문수

 


순천 동부지역사회연구소 등 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는 1990년대 초에 장도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근 왜성은 예산을 들여 보존하면서 이순신 장군 유적지는 방치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혼이 서린 장도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d

장도가 광양만에 있는 여느 섬과 달리 역사적 의미를 가진 섬인데는 연유가 있다. 장도는 1598년 왜군의 침략과 퇴로 거점이던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왜성을 공격하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이 머물던 전진기지다.

이순신 장군은 당시 조선삼도수군통제사로 이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뒀다. 역사적으로는 이 전투의 승리로 길고 지루했던 7년간의 임진왜란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1월에 이순신 장군이 썼던 난중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1월 8일]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어 하루 종일 술을 마시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잠시 후 도독이 보자고 하므로 나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 왜교의 적들이 10일 쯤에 도망해 철수한다는 전갈이 육지로부터 통지되어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했다.

 

 장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모습
 장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모습
ⓒ 오문수

 

 

 

 

 장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인근의 늑도와 대늑도 주민들까지 와서 사용했던 샘터가 있었다
 장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인근의 늑도와 대늑도 주민들까지 와서 사용했던 샘터가 있었다
ⓒ 오문수

 


[11월 13일] 왜선 10여척이 장도에 나타나므로 바로 도독과 약속하고 해군을 거느리고 뒤쫒으니 왜선은 잔뜩 겁을 먹고 들어가 종일토록 나오지 않았다. 도독과 함께 다시 장도로 돌아와 진을 쳤다.

1598년 11월 13일 장도 전투가 끝나고 왜군이 주둔한 왜교성(장도에서 2.06㎞ 거리) 인근에서는 소규모 충돌이 있었다. 그 사이 왜교성에 고립된 일본군을 구하기 위해 왜군이 노량으로 진입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정확히 일주일 후인 11월 19일 장도에서 24㎞떨어진 노량에서는 1천여척의 삼국수군이 명운을 건 결전을 벌였고 이순신장군이 전사했다. 결과는 임진, 정유의 오랜 전쟁이 끝났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도독은 명나라 장수 진린을 말하고 왜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코끼리가 귀양 온 섬 장도

산업화에 밀려 육지가 되어버린 장도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최초로 우리나라에 온 코끼리가 장도로 귀양 온 것.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 권 21(태종 12년(1412년) 2월 22일)과 권 24(태종 12년(1412년) 12월 10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코끼리를 말과 수레 등을 관장하던 관청인 사복사에서 기르게 명령하니, 날마다 콩 4~5말을 소비하였다."

"처음에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길들인 코끼리를 바치므로 삼군부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공조전서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 보았으나,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그리고 일 년 뒤인 태종 13년에 코끼리와 관련된 새로운 기록이 나온다. 병조 판서 유정현이 임금께 진언한 내용이다.

 

 

 

 

 

 

 

 

 

 장도 정상에는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다. 이곳에서 왜군이 주둔했던 왜교성은 2.06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조선과 명나라, 왜수군이 격전을 치른 현장이기도 하다.
 장도 정상에는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다. 이곳에서 왜군이 주둔했던 왜교성은 2.06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조선과 명나라, 왜수군이 격전을 치른 현장이기도 하다.
ⓒ 오문수

 


"일본에서 길들인 코끼리를 바쳤으나 이미 임금님께서 좋아하여 가지고 노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는데, 만약 법대로 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사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먹이로 콩이 거의 수 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옛 사례를 본받아 전라도의 섬에 두소서."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코끼리를 전라도의 섬에서 기르도록 명하였다는 것이다. 태종 14년에 전라도 관찰사가 올린 장계에는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놓아서 기르는데, 미역 등 해조류를 먹지 않아 말라가고 있으며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장계를 받고 코끼리를 불쌍히 여긴 왕은 1년 만에 사면을 했지만 먹성이 너무나 좋은 코끼리는 천대를 받았다. SNS를 검색해보면 '코끼리를 귀양 보낸 장도'가 율촌 장도와 보성 장도로 나뉘어 보도가 나온다.

오래전 모 방송국 PD가 장도를 취재할 때 도움을 줬던 여수지역사회 김병호 이사장은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순천부라고 나와 있지 않느냐. 당시 보성은 낙안군이었다"며 "오보!"라고 단언했다.
 
광양만의 중심에 위치한 장도..."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벌이가 좋았었는데"

광양만 입구의 중심은 묘도이고 산업단지가 몰린 광양만권 상류의 중심은 장도이다. 1995년경 100여세대에 500여 주민이 살았던 장도는 물이 빠지면 거대한 갯벌을 이루고 게들의 천국을 이뤘다.

고동이 기어다니고  망둥어 새끼들이 살려고 몸부림을 치면 주민들은 바다에 나가 바지락을 채취했다. 이곳은 광양만권 최고의 어패류 서식지였다. 맛이 좋고 속이 찬 어패류는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한 주민의 얘기다.

"전에는 고기가 많았어요. 옛날에는 말도 못해요. 지금 어장 10개 해도 그 당시 2개만 못해요. 조기, 꽁치, 고등어, 전어, 숭어, 게, 꽃게. 아휴! 입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죠. 그런데 여수국가산단이 생기고 나서 고기가 잡히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서 잡는 모든 고기는 불법이래요."

 

 

 

 

 

 

 

 

 

 

 장도 앞 바다에서 본 일출모습. 저 멀리 여수국가산단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다
 장도 앞 바다에서 본 일출모습. 저 멀리 여수국가산단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다
ⓒ 오문수

 

 

 

 

 

 

 20여년전 장도에서 이주한 장도 주민들은 월산마을에 살고 있다. 굴을 까고 있는 주민들 모습
 20여년전 장도에서 이주한 장도 주민들은 월산마을에 살고 있다. 굴을 까고 있는 주민들 모습
ⓒ 오문수

 


광양만에서 고기 잡는 게 불법이라는 얘기를 듣고 확인차 항만청 관계자에게 전화해보니 사실이었다. 광양만을 개발하면서 어민들에게 어업보상을 다 해줬고 일부 섬에서는 이주보상비까지 지급했다고 한다. 고기를 잡으면 안 되고 양식도 안 된다고 한다.

장도에서 살던 주민 80가구 200여명은 20여년전 월산마을로 이주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5~60대 주민들은 옛날에 살던 방식 그대로 고기를 잡고 산다. 골목길에 천막을 치고 굴을 까던 주민에게 장도에서 살던 시절과 월산마을로 이주해온 후의 생활을 비교해달라고 요청했다.

 

 

 

 

 

 

 

 

 

 장도 앞바다 선착장에는 "산단조성공사로 광양만권이 썩었다. 환경오염이 발생해 우리주민 못 살겠다. 정부는 하루빨리 이주대책 수립하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장도 앞바다 선착장에는 "산단조성공사로 광양만권이 썩었다. 환경오염이 발생해 우리주민 못 살겠다. 정부는 하루빨리 이주대책 수립하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 오문수

 


"월산마을에서 사는 게 좋냐고요? 당연히 안 좋죠. 장도에서는 바다로 나가 호미로 파기만 하면 돈이었어요. 여기서는 땅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단지 분양받은 집 한 채만 있지요. 바닷가에서 해산물 잡으면 농사짓는 것보다 벌이가 좋았어요. 겨울에는 굴, 바지락과 함께 별고기 다 잡았죠. 산단 생기고 나서 바다를 막아버리니까 고기도 안 들어오고 오염이 돼서 패류도 줄었어요"

황금바다를 잃은 장도 주민들은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
장도 이주민 2017-01-23 18:35:03
그 아름다웠던 곳을 잊지 못해 노루섬과 똑같은 곳을 몇 년을 찾다가
비슷한 곳에 터를 잡고 사시면서도 고향이 그립다고 항상
되뇌이시던 아버지는 이제 천국에 계십니다.
천국에서 이렇게 달라진 고향을 보시고 어떤 마음이실까요...
아버지도 장도도 그리워지는 오늘입니다
장도 이주민 2017-01-23 18:32:48
장도에서 이주해 나온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이 때쯤이면 지천에 널린 꼬막을 갯성에가 낀 바닷가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철판위에 놓고 구워 먹었었죠.
그 맛은 최고급 조개구이집도 흉내낼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한 여름 바닷가 바위돌틈 아래 무더기로 붙어 있던 고둥과
초등학생들도 호미들도 나가면 한 자루씩은 너끈히 잡아냈던
바지락...바지락이 호미 끝에 걸려 냈던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그립습니다.
노루 섬 정상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학교 뒷산도 너무나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