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수산단과 율촌산단에 둘러싸인 작은 섬 소늑도는 한바퀴 도는데 10분 걸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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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이재언 연구원과 함께 광양만에 있는 작은 섬 소늑도를 방문했다.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여동리에 있는 소늑도는 면적 0.02㎢의 작은 섬으로 경지 면적은 밭이 0.01㎢, 임야는 0.01㎢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섬의 최고 지점은 20m로 섬 전체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며, 섬 주위에 간석지가 발달하였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성암인 중성화산암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토양은 신생대 제4기 고온 다습한 기후 환경에서 만들어진 적색토가 넓게 분포한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걸어서 10여분이면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이지만 10여년전까지 11세대가 살았다. 이렇게 작은 섬에 왜 11세대나 살고 작은 분교까지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 소늑도 모습으로 10여채의 집이 보이지만 이강재씨 혼자 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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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늑도에는 고롱골나무 20여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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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주변에 꼬막과 바지락, 굴 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썰물 때면 중늑도까지 갯벌이 드러나고 수심 5m 이내인 늑도 주변은 패류서식지로는 최고의 환경을 갖췄다.
1939년 경 기독교 순천교회의 선교사가 섬 일부를 매입하여 기도원으로 활용하면서 신도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폐허가 된 마을 뒷산에 올라가니 허물어진 기도원의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혼자 살지만 고향이니까 좋다는 이강재씨... 개발 안 하고 저대로 뒀으면
▲ 송도에서 소늑도로 우리를 태워준 이강재(왼쪽)씨와 이재언씨가 대화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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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사랑하는 이강재씨 방에 있는 기타가 3개나 됐다. 파도와 갈매기소리가 어우러진 이씨의 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잠잘 시간도 없다는 그의 하소연에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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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6살 때 소늑도로 이사 온 이강재(52세)씨는 이웃한 섬 송도가 고향이다. 순천에서 음악학원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열 아홉살 때 태진아, 송대관, 현숙 등 유명가수들이 노래할 때 백밴드를 하기도 했다"고 자랑했다.
폐교된 분교에서 혼자 사는 그의 방에 가보니 기타가 3대나 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파도와 갈매기소리를 벗 삼아 기타를 치며 음악을 즐기는 그가 섬에서 홀로 사는 이유를 설명했다.
▲ 분교였다가 폐교가 된 집을 손질해 이강재씨 혼자 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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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씨가 사는 집에는 우물도 있다. 이재언 연구원이 우물물을 길어 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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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좋아하고 축구선수도 해봤어요. 여동생들은 공부를 잘해 잘 살아요. 결혼에 실패하고 혼자 고향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섬 생활은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잔일이 많아요. 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11세대가 괜찮게 살았는데 바다가 오염이 돼서 바지락이 싹 까져버려요. 혼자 살아도 고향이니까 좋아요. 그냥 개발 안하고 저 상태로 뒀으면 좋겠습니다"
방수복을 입고 두건을 쓴 채 조그만 배를 끌고 고향바다를 묵묵히 지키는 그는 고독을 숙명처럼 여기는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이씨의 섬 생활도 몇 년이나 계속될지 모른다.
주변으로는 율촌지방산단과 여수국가산단, 광양국가산단이 들어서며 어업권 보상이 끝나고 양식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머잖아 근방의 섬들도 매립이 되어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 산더미처럼 쌓인 굴껍질을 보고 조그만 섬에 11가구나 살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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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뒷산에 서있는 무너진 기도원의 모습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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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마리의 염소들이 섬의 또 다른 주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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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돌아보니 농촌보다 어촌이 훨씬 소득이 높고 잘 산다는 판단이 들었다. 농민은 씨를 뿌리고 수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민은 호미 하나만 들고 바닷가에 나가면 돈이 되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여수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고민에 빠졌다. 경제발전을 위해 산단을 개발해야 옳을까? 보전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