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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처럼 사라지게 된 구봉산 '칼바위'

"임산부를 위해 석수쟁이가 조각냈다"

  • 입력 2017.02.25 21:04
  • 수정 2017.02.25 21:06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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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에서 올려다 본 구봉산 칼바위

구봉산의 바위중에 '칼바위'가 있다

여수의 구봉산정상 뒤편 암벽위에는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칼바위라고 부르는 바위 하나가 산꼭대기와 키 재기라도 하려는 듯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는 모습으로 솟아 있었다.

우리의 인류역사에서 바위는 사람들로부터 강하고 신령한 존재로 여겨 형상에 따라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늘로 통하려는 선돌문화이며 구봉산의 칼바위도 그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칼바위는 눈만 뜨면 바라보는 구봉산 서북방 주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친구처럼 수호신처럼 마음 깊은 곳을 차지하고 대대로 함께 살아온 구봉산의 상징물 노릇을 하여 왔다.

그렇지만 삼일만세운동 함성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 시대적 그릇된 풍속을 뛰어 넘지 못해 그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비운을 맞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까마득한 시절의 전설처럼 들리고 칼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주던 몇몇 사람들의 기억에서 마저 잊혀가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2012년 11월 대치마을 노인당에서 우연히 '칼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 달여에 걸쳐 증언수집과 현장을 찾아 확인하면서 되살려 세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정리하였다.

방송국 송신소 사이길로 가면 칼바위를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다.

구봉산에서 '칼바위'의 위치

증언에 의하면 칼바위가 서 있었던 장소는 구봉산 정상의 뒤편 깎아지른 암벽위다. 정상에서 서쪽 등산로로 약 10여 미터 내려온 현재 MBC와 KBC중계소 건물사이의 골목길 뒤편으로 그곳이 현재는 자갈, 흙, 잔디로 덮여 있다.

거기다 칼바위가 서 있었던 지점 부근인 정상에서 MBC중계소를 거쳐 헬기장으로 이어지는 능선 일대를 대치마을 노인들은 ‘칼바우등’이라 부른다.

칼바위의 모양과 그 이름의 유래는?

구봉산 칼바위는 표면에 윤기가 나고 생김새는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였다고 전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대치마을에서는 마치 하늘을 향해 곧추 세워 놓은 칼처럼 보였지만, 사선으로 보이는 신월리에서는 바랑을 지고 가는 허리 굽은 스님의 모습으로 보여서 신비로움을 주었다고 한다.

크기에 대한 질문에는 몇 토막이 났다는 증언 중에  대여섯 길은 넘었을 것이라고 했고, "사람들이 칼바위에 오르려고 해도 잘 오르는 사람이 겨우 칼자루밖에 못 올라갔다"고 하니 족히 십여 미터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옛날부터 칼바위가 보이던 마을은 구봉산 서북쪽의 신월리, 대치, 허문쟁이를 비롯한 지금의 여서동과 문수동에 있던 마을들이었다.

그중에도 칼바위와 가장 가까이서 산비탈과 골짜기를 삶의 터전으로 살던 대치마을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형상이 칼을 닮아서  '칼바위'라고 불리워졌고, 그 이름이 인근 모든 마을사람들에게 전파된 듯 하다.  

한때 구봉산을 상징하는 '칼바위'였으나 이름과 함께 바위도 사라지고, 칼바위가 있던 자리만 더러 에기하곤 한다.

한참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토막난 칼바위

 

칼바위가 사라지게 된 사연과 경위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해까지만 해도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었던 칼바위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손에 의해 정말 어처구니없이 사라져버리게 된 사연이 있다.

칼바위를 쓰러뜨리기 직전 무렵 신월리에는 임신한 여인들이 유산을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자 마을에는 누가 퍼뜨렸는지도 모르게 밤에 칼바위에서 반사되는 불빛을 애기 밴 여자가 보고 놀라 유산이 된다는 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유산이 이어지자 그때마다 석양에 햇빛이 반사되는 것을 보고 그랬다느니, 보름날밤 칼바위에 반사되는 달빛을 보고 애기가 떨어 졌다느니, 마을의 분위기는 흉흉해지고 칼바위에 대한 원망이 커져갔다.

그렇게 되자 마을의 유지인 '공 부자'가 나서서 칼바위를 떨어 버려야 마을에 재앙이 사라진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비로 석수를 고용하여 지시를 내리자, 그날부터 석수는 칼바위 밑을 돌아가며 정으로 쪼고 쐐기를 박아 자르는 작업을 여러 날 계속하여 드디어 칼바위를 쓰러뜨리는 날이 되자 신월리와 대치 사람들은 모두가 잘 보이는 곳에 모여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칼바위가 넘어져 서너 동강이 나면서 굴러 내리자 계곡은 온통 우레와 같은 소리로 가득했고, 토막들은 굴러 바로 밑 너덜 근처에 하나, 속등에도 하나, 제일 멀리 굴러 내린 것은 큰터골 금바우 영감 논 위까지 굴러와 멈추었다.

그런데 칼바위가 무너지기 전까지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번개와 장대비가 쏟아지고 집으로 돌아 간 석수는 정신이상 불구가 되어 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상쪽에서 내려다 본 구봉산 칼바위

칼바위를 조각낸 것은 사실인가? 전설인가?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생명과 행복을 기원하며 살아온 크고 작은 수많은 바위들이 존재 한다. 이는 토테미즘에 기초를 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민간신앙으로 자리를 잡아 왔다. 우리나라는 물론 여수지방에도 마찬가지로 마을마다 그런 바위가 없는 곳이 없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신앙적인 대상으로는 거의 사라졌으나 문화적인 대상으로는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것들도 적지 않다. 특히 특별한 모양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바위는 관광문화상품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고 활용하려는 추세이다.  장군산의 촛대바위 금오도 비렁길의 남근바위도 충분히 눈길을 끌만하며 그 외에도 찾아보면 스토리텔링이 될 만한 바위들이 많을 것이다.

“칼바위가 지금까지 있었으면 명물이 되었을 텐데…”

대치마을 노인들의 아쉬움이 담김 목소리가 귓전을 맴 돈다. 여수구봉산의 칼바위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실화이다.

증언에 도움을 주신 분들(2012년 12월)
: 대치마을 안태현(85) 서성윤(83) 이석주(83) 서장철(77) 한성수(76)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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