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국정농단 주범들, 매천 황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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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국정농단 주범들, 매천 황현이 그립다
  • 정병진
  • 승인 2017.03.0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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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 선생 생가를 찾아서
매천 황현 선생 생가 광양 봉강면 석사리 매천 황현 선생 생가
▲ 매천 황현 선생 생가 광양 봉강면 석사리 매천 황현 선생 생가
ⓒ 정병진

 


3.1절 아침, 가족을 데리고 전남 광양 봉강면 석사리 매천 황현 선생(1855~1910) 생가를 방문했다. 광양시가 그를 기리고자 복원한 초가집이고 볼거리는 크게 없으리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네 칸짜리 초가집 하나 둘러보려 간 게 아니다. 삼일절을 맞아 선생의 자취를 직접 찾아 그 뜻을 새겨 볼 요량이었다. 황현 선생 생가는 광양 읍내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마을에 위치하였다.

벽화가 그려진 좁다란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초가지붕 생가가 보였다. 대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한 중년 부인이 방문을 열고 나와 맞이한다. 순간 "황현 선생 후손이 거주하는가 보다" 했다. 아니었다. 박영숙 문화해설사다. 휴일임에도 이따금 찾는 관람객들을 위해 근무 중이었다. 작은 초가에 문화해설사가 배치돼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반가웠다.

박 선생에 따르면 매천 황현 선생은 이건창, 김택영과 더불어 구한말 3대 문장가에 속한다. 또 그는 한시만 1천여 수 이상 남긴 시인이고 <오하기문>, <매천야록> 같은 역사서를 남긴 역사가다. 장수 황씨로서 대대로 남원에 살다가 조부 때 광양으로 이주하였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나 순천 광양 일대에선 '황신동'으로 불렸다 한다. 그의 선대에는 15대조에 황희 정승, 10대조에는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병마절도사 황진 등이 있다.

하지만 황현 선생 때 그의 집안은 벌써 몇 대째 관리를 배출하지 못한 몰락 양반에 속하였다. 조부는 매천의 남다른 글재주를 보고 가문을 일으키리라 크게 기대한 모양이다. 황현은 스물아홉 나이에 한양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서 1등하였다. 한데 당시 답안지 위쪽에는 고조부, 증조부, 조부, 외조부가 누군지를 적는 '사조단자'라는 게 있었다. 매천의 답안지를 살펴본 시험관은 그의 집안에 벼슬아치가 없자 1등인 매천을 2등으로 낮추었다. 집안 배경이 없음을 알고는 면접에서 그를 탈락시키려 한 것이다. 이를 안 매천은 그 길로 귀향하여 독서와 저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가 남긴 <매천야록>은 구한말 연구를 위한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고종실록, 순종실록 등은 일제가 기록에 관여해 왜곡되고 빠진 내용이 많으나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은 편년체(역사 기록을 연·월·일순으로 정리하는 편찬 체재)로 정직히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인 1955년 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자료총서 제1집으로 발간한 책자가 <매천야록>이기도 하단다.  <매천야록>은 황현 선생이 탈고한 책은 아니다. 그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을 당한 사실을 마지막으로 적고는 절명수 4수를 남기고 자결하였기 때문이다.
 

황현 선생의 절명시 한일병합 이후 유서로 남긴 황현 선생 절명시
▲ 황현 선생의 절명시 한일병합 이후 유서로 남긴 황현 선생 절명시
ⓒ 정병진

 


그는 절명시 3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세상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구나

경술국치 이후 금산군수 홍범식, 참판 홍만식, 시종무관장 민영환, 특진관 조병세 등이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사실에 분개하고 수치스러워하며 자결하였다. 이들과 매천 선생 순국의 차이점은 매천은 국록을 먹던 관료가 아님에도 조선 선비의 도를 다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데 있다. 그는 나라가 망했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시골 선비인 자신이라도 '인(仁)'을 이루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천 황현 선생의 사진과 초상화 보물로 지정된 매천 황현 선생의 사진과 초상화의 모사본
▲ 매천 황현 선생의 사진과 초상화 보물로 지정된 매천 황현 선생의 사진과 초상화의 모사본
ⓒ 정병진

 


당시 매천 선생은 친구인 창강 김택영처럼 망명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포기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설 수도 있었겠지만 건강이 허락지 않아 감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남은 한 가지 선택지인 순국을 택하였다. 그의 자결은 충동에 의한 갑작스런 결행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려는 듯 1년 전인 1909년 서울 대한문 앞에 국내 최초로 생긴 천연당 사진관에 들러 초상화를 대신할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구한말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은 매천 선생이 사망한 1년 뒤인 1911년 그가 남긴 사진을 참고해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 매천 선생의 사진과 초상화는 2006년 12월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됐다.

헌정질서를 문란케 하고 국격을 크게 실추시킨 지금의 국정농단 주범들 중에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앞에 진솔한 자세로 사죄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미 빤히 드러난 범행조차 다들 모르쇠로 부인하기에 급급하며 조금이라도 처벌을 덜려고만 한다. 도대체 작금의 사태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자들은 눈 씻고도 찾기 힘들다. 특검 조사 결과를 보면 최순실이 사회 각 분야의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사실을 찾기 힘들 정도인데 그런 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무수한 관료들은 왜 지금껏 그 흔한 반성문 하나 내놓지 못하는지 모를 일이다.
 

꼬마 손님들 태극기 들고 생가를 찾은 꼬마 손님들. 문화해설사 박영숙 선생이 황현 선생에 대해 설명 중이다.
▲ 꼬마 손님들 태극기 들고 생가를 찾은 꼬마 손님들. 문화해설사 박영숙 선생이 황현 선생에 대해 설명 중이다.
ⓒ 정병진

 


이런 현실의 답답함 때문인지 국정농단 사태 이후 매천 선생 생가를 찾는 시민들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도 오십대 한 아저씨가 홀로 다녀갔고 초등생 딸과 유치원생쯤 돼 보이는 아들을 둔 젊은 부부도 애들을 데리고 들렀다. 그 부부는 아이들 손에 각각 태극기 하나씩을 들려 깃발을 흔들며 방문하였다. 아빠는 딸과 아들에게 삼일절이 무슨 날이고 매천 황현 선생이 어떤 분인지 조금이라도 일깨워 주고자 애쓰는 게 역력했다. 덕분에 문화해설사 박 선생은 초등 저학년 아이가 알아듣게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아빠는 "앞으로 종종 찾아오면 무슨 소린지 알 거"라며 남매에게 황현 선생의 정신을 꼭 알려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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