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쌍바구 약수터

  • 입력 2017.03.07 16:50
  • 기자명 김배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쌍바구 약수터

연재를 시작하여 세 번째 원고를 보내고 나서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골라볼까 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유는 연재 전에 부담감을 갖는 나에게 편집국에서 "억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달라"는 일임에 오히려 무게감 있는 멋진 소재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침 정월대보름이라  칠팔년 전 봄 우연한 등산길에 들렀던 처음 본 약수터에 금줄이 처져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정월 보름에 친 것이 틀림 없었다. 이 높은 산 위에 지금까지도 누군가가 정성을 드리는 것을 보면서 예사 약수터(샘)가 아니라는 생각에 내력을 조사하였고, 마침 대보름을 맞으면서 정리하여 네 번째 이야기 "쌍바구 약수터"를 구봉산의 역사 흔적 중의 하나로 소개하고자 한다.

‘쌍바구 샘’ 이름과 그 내력

인근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인 쌍바구의 바구는 표준말 바위가 ‘바우’, ‘바구’로 발음이 변한 방언이다. 그러므로 표준말로는 ‘쌍바위 약수터’가 된다.

약수터에서 본 큰 쌍바위

그리고 쌍바구는 두 개의 바위가 이웃하여 짝을 이루고 있어 한 쌍이라는 뜻이다. 약수터에 가보면 바로 옆 약15m 전 길 아래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비탈에 기댄 자세로 등을 내말고 있고, 사람들이 바위의 머리 위를 지나다닌다. 그리고 짝이 되는 조금 작은 바위는 입구방향으로 90m 가량 거리를 두고 큰 바위와 비슷한 모습으로 역시 길 아래 등을 내밀고 있다.

필자가 맨 처음 약수터에 갔을 때 둘레에 쳐져 있는 금줄을 보고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아 내력을 조사해 보니 역시 ‘쌍바구 약수터’는 수백 년 동안 ‘쌍바구 샘’이라는 이름으로 인근마을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정신적 의지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골짜기의 주인인 신월리 사람들에게는 마을의 큰 샘과 생명수의 맥이 이어진 모천과 자천 관계로 여겨 신성시 하였고, 신월리는 물론 ‘대치’, ‘허문쟁이’를 비롯한 인근의 모든 마을 여인들에게는 아이를 점지 받기 위해 정성을 빌었던 신성한 비손 처였다.

지금은 시대의 변천으로 그러한 풍습은 사라졌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도 비손의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쌍바위 약수터 가는 길

쌍바구 약수터는 한국화약 후문으로부터 구봉산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능선의 우측(남) 골짜기 상단에 가까운 266m 높이에 있다. 정상에서 굽어보면 북서(300〬)방향 한국화약 안쪽에서 형성된 골짜기이며 이름을 모박골이라 한다.

약수터로 연결되는 길은 한국화약 후문 길 정상으로부터 400m 아래지점에서 비탈을 돌아 약수터를 거쳐 금호아파트 길의 정상으로부터 200m 아래지점으로 이어지며 두 곳에 각각 약수터라는 이정표가 있다. 그렇지만 옛날 길은 한국화약이 들어오기 전까지 신월리 사람들은 골짜기가 길이었고 현재의 한국화약 후문 등산로 길은 대치마을 사람들이 주로 다니던 길이었다.

쌍바구 약수터는 오랜 세월 동안 구봉산 서북 편 마을사람들의 정서를 지배하면서 신성한 곳으로 자리를 지켜왔었다.

쌍바위에서 본 약수터

그러나 이제는 시대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영혼을 의지 했던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고 가끔씩 등산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지나며 목을 축이고 가는 간이 쉼터로 변하여 ‘쌍바구’라는 본래의 이름마저 잃어버리고 그저 약수터로만 불리고 있다

선조들의 삶의 현장이었던 이곳 약수터의 이름을 찾아 주고 싶다 이제는 ‘쌍바위 약수터’라고.

쌍바위 머리와 거기서 본 한화 공장

[증언으로 듣는 쌍바구 약수터] 

2013, 3. 5 오후. 대치마을 경노당 (문점덕(81) 할머니 등 11명의 마을 어르신)

- 안녕하십니까? 저기 진등 안쪽에 있는 약수터에 대해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할머니들: 쌍바구 샘 말인 갑구만

- 이름이 쌍바구 샘이에요?
*할머니들: 옛날에는 그랬어라

- 약수터 부근에 쌍바위가 있어요?
*할머니들: 약수터 앞에 질(길) 밑으로 큰 바구가 묻혀 있어라

- 약수터 밑에 가요?
*할머니1: 밑에 말고 바로 옆에 길 밑에 말이여 그런께 사람들이 꼭대기를 볿(밟)고 지내 댕기는디 밑으로 백(박)혀 있은께 못 봤는 갑구만

-아~ 그러니까 약수터 앞이 아니라 길로 가자면 앞이구먼요?
*할머니1: 한 이십 미터나 그 정도 될것이여 거그가 손 비비고 그런디여

- 바위에다 손을 비볐어요?
*할머니2: 하~ 거그서 손을 비볐지
*할머니3: 어디가(뭘) 바구에다 손을 비벼 샘 앞에서 비볐제 알도 모름서 그래(할머니 2와 3이 서로지지 않고 잠시 우김)

*할머니1: 그때는 약수터가 지금 같이 좋게 안 만들어져 있고 물이 우게(위에) 바구틈에서 나왔는디 그 앞에다 촛불을 써(켜)놓고 빌었어라 (할머니2가 입을 다물어 버림)

-그러니까 거기가 비손 장소인 모양인데 누가 손을 비볐어요?
*할머니들: 옛날부터 아들 못 낳는 사람이 빌었제
*할머니1, 3: (필자 옆의 할머니를 가리키며) 그 옆에 승주 어무니가 거그서 손 비벼 갖고 아들을 너이나 낳슨께 그 양반한테 물어봐

- 승주 어머니란 할머니를 향해 몸을 돌리며) 할머니가 거기서 손 비볐어요?
*승주 어머니: 비볐지(미소를 지으며)

- 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승주 어머니: (조금 머뭇거리더니) 문0덕이

-연세는요?
*문 할머니: 팔십 하나(81세) -<여기서부터는 문 할머니로 기록>

- 그래가지고 아들을 낳았어요?
*문 할머니: 십년 만에 아들을 연달아 너이 낳고 마지막으로 딸 하나 낳았어라

- 결혼하고 얼마 만에나 손 비비러 다니셨어요?
*문 할머니: 삼년 넘어서 일 것이여

*할머니들: 그때는 삼년이 되도 애기를 못 나먼 구박을 받을 때제

- 몇 살에 시집을 오셨는데요?
*문 할머니: 내가 열여덟에 곰챙이(웅천)서 대치로 시집을 왔어

- 그러니까 열여덟에 시집을 오셔가지고 삼년이 지나도록 애기가 안 들어서서 쌍바구로 손을 비비러 다니셨다 이거지요?
*문 할머니: 그랬제

- 날마다 다니셨어요?
*문 할머니: 뭘(어떻게) 날마다 다녀! [가끔] 한 번씩 다니지 초하루나 보름 뭔(무슨) 일 있는 날 가고 그러제

-다른 사람들도 다닌 것 보셨어요?
*문 할머니: 전에부터 애기를 못 나는 여자들이 애기 난다고 비비로 댕긴디여

-필자: 할머니가 손 비빈 데는 어디예요?
*문 할머니: 물 나온디 앞에, 어쩔 때는 [누군가가] 촛불을 피워 놓고 가고 그래

- 승주어머니는 거기 가서 손을 비벼 가지고 아기를 낳았다고 생각하셨어요?
*문 할머니: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제, 다(모두) 그럴 땐께(모두 웃음)
*할머니3: 쌍바구(약수터)는 물이 돌 새(틈)에서 나오는디 물이 영 좋고 그때는 물도 많이 나왔어라 보름이면 신월리 사람들이 금줄을 치고 신성하게 생각을 했지요

-한 삼년 전에 갔을 때만 해도 금줄이 있었는데 요즘은 안 보이더구먼요
*할머니3: 금줄 치로 댕기는 사람이 죽어 부렀는 갑지라
*할머니1: 신월리에 군인들(14연대)이 있을 때만 해도 그리 막 올라 댕긴께 골짜기로 질(길)이 훤 했었는디…
*할머니2: 쌍바구 샘이 지금은 앞으로 끄집어 내 갖고 세멘트로 해 놔부렀드만 전에는 우(위)에 바구밑에서 나왔는디

-승주어머니도 막 치고 밤새워 공을 들이고 그랬어요?
*문 할머니: 고개를 저으며 화사하게 웃음 (웃음 속에 긍정이 느껴짐)
*옆 남자 방에서 보고 계시던 한성수(78) 노인: 신월리 큰 샘하고 쌍바구 샘이 한물인가 쌍바구에 산태가 난께 큰 샘물도 부해(흐려) 지드란께

-쌍바구 샘에서도 샘굿을 했어요?*할머니3: 거그는 금줄만 치고 동네 샘에 제를 지낼 때먼 위(뒤까끔 샘)에서 제를 지냈다고 소리를 지르면 밑에(큰 샘)서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제를 지내고 그랬어라.

문: 이야기 고맙습니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