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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아름다운 여수, 어두운 역사도 기억하자

잊어야 할 역사는 없다. 관광 여수, '다크 투어리즘' 고민할 때

  • 입력 2017.04.03 20:28
  • 수정 2017.04.04 06:26
  • 기자명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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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도 장군도는 국내 유일의 수중석성과 죽방렴 있던 곳이다.
▲ 장군도 장군도는 국내 유일의 수중석성과 죽방렴 있던 곳이다.
ⓒ 황주찬

 


매화나무에 꽃망울 맺히는 삼월이면 여수는 바빠진다. 봄바람에 겨우내 움츠렸던 바다가 선창을 비릿한 생선냄새로 가득 채운다. 뭇 배들은 요란한 잔물결 만들어 무심한 바다를 은빛으로 물들인다. 오동도 동백은 붉은 꽃을 송두리째 몸에서 떼어내 땅에 흩뿌려 여수 봄 풍경에 붓질을 더하게 만든다.

이런 경치 보려고 지난 해 1000만 명 훌쩍 넘는 이웃들이 여수를 찾았다. 연인과 가족이 봄바람 못 이겨 문 밖으로 나서는 계절이다. 아름다운 시간에 여수가 간직한 아픈 역사를 둘러봤다. 지난 3월 25일,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 부설 매영답사회 제150차 정기답사에 따라 나섰다.

이글은 답사회 자료집과 회원 간 대화를 참고했다. 답사는 '매영답사회' 이름을 푸는 일부터 시작했다. 매영답사회의 '매영'은 전라좌수영의 별칭이다. 예전 전라좌수영은 주변에 매화나무가 많아 '매영성(梅營城)' 또는 '매성'이라 불렀다. 이에, 답사회는 전라좌수영 별칭을 따라 매영답사회로 이름 붙였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양치유 선생의 '수헌시고'를 국역한 책이 '매화꽃 핀 좌수영'이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좌수영성 주변엔 꽤 많은 매화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좌수영성 주변에는 매화나무가 없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른 듯하다. 각설하고 답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수헌시고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양치유 선생의 ‘수헌시고’를 국역한 책이 ‘매화꽃핀 좌수영’이다.
▲ 수헌시고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양치유 선생의 ‘수헌시고’를 국역한 책이 ‘매화꽃핀 좌수영’이다.
ⓒ 황주찬

 


장군도, 국내 유일 수중석성과 죽방렴 있던 곳

국토 최남단에 위치한 여수는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 교차하는 바다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하지만 아픈 역사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생긴 유적도 많고 가까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군사유적도 흔하다.

이들 모두 버릴 것 하나 없는 여수의 질긴 역사다. 잊어야 할 역사는 없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방치된 이들 유적을 잘 보존해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답사 당일 봄비가 내렸다. 화사한 봄꽃 구경할 생각에 마음 들떴는데 실망이다. 차분하게 답사길 둘러보라는 자연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장군도(將軍島)라는 작은 섬이다. 이 섬은 국보 제304호인 진남관 앞바다에 떠 있는 무인도다. 여수 사람들은 이 섬의 가치를 잘 안다. 큰바람 막아주는 고마운 섬이고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호좌수영지>를 보면 '호남과 영남의 목과 같은 곳(湖嶺咽喉之地)'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만큼 장군도는 의미있는 섬이었다.

장군도 옆 바다에는 수중석성(水中石城)이 있다. 연산군 3년(1497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량 장군이 섬 주변 빠른 물살을 이용해 전라좌수영 앞바다를 무시로 넘나들던 왜구를 막기 위해 관민들과 함께 쌓은 성이다. 그 후, 섬은 장군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과거 여수 사람들은 시누대가 많은 섬이라 하여 장군도를 죽도(竹島) 또는 대섬이라 불렀다.

섬에는 장군의 공을 기려 후세 사람들이 세운 '이량장군방왜축제비(李良將軍 防倭築堤碑)'라는 기념비석도 있다. 현재 장군도에 시누대는 거의 없고 벚나무만 무성하다. 일제 강점기때 재향군인회가 나서 섬에 왕벚꽃 나무를 심어 큰 군락을 이뤘고 지금은 그 2세대 나무들이 섬을 뒤덮고 있다.
 

곡사포 진지 도실마을 곡사포 진지에 있던 대포는 70년대 중반 어느 고물상이 잘게 부셔 가져가 버렸다.
▲ 곡사포 진지 도실마을 곡사포 진지에 있던 대포는 70년대 중반 어느 고물상이 잘게 부셔 가져가 버렸다.
ⓒ 황주찬

 


"어릴 적 동무들과 대포 구멍 드나들며 놀았다"

1970년대 초까지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에는 죽방렴(竹防簾)이 있었다. 잔잔한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만 섬에 사연이 참 많다. 섬을 둘러본 뒤 일행은 돌산 도실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때 곡사포 진지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1년 7월 7일 일제는 여수에 '요새부대' 편성을 명령한다.

요새부대는 요새사령부와 요새중포병연대 그리고 요새방공대와 병원으로 구성됐으며 그 숫자는 589명(장교 27명, 하사관 및 병 562명)에 이른다. 이들 중 일부가 돌산 도실마을 곡사포 진지에 배치됐다. 산중턱에 위치한 유적지로 가던 중 마을 어르신 박승구(68세)씨를 만나 옛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릴 적 꽤 큰 곡사포가 마을 뒷산에 있어서 동무들과 대포 구멍을 드나들며 놀았다"고 증언한다. 현재 곡사포 진지는 흔적을 찾기 어렵고 쇠로 만든 포(砲)는 70년대 중반 어느 고물상이 잘게 부셔 가져가 버렸다. 곡사포 진지는 어두운 과거 유적이지만 후세에게는 훌륭한 교육 장소다.
 

해안포 진지 콘크리트로 지은 벙커형 진지에는 어린아이 팔로 한 아름쯤 되는 긴 해안포가 놓여 있었다.
▲ 해안포 진지 콘크리트로 지은 벙커형 진지에는 어린아이 팔로 한 아름쯤 되는 긴 해안포가 놓여 있었다.
ⓒ 황주찬

 

 

바다 진지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경은 당시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아름다웠다.
▲ 바다 진지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경은 당시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아름다웠다.
ⓒ 황주찬

 

 

해안포 진지 80년 가까운 세월에도 여전히 포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튼튼했다.
▲ 해안포 진지 80년 가까운 세월에도 여전히 포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튼튼했다.
ⓒ 황주찬

 


진지가 잘 보존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이어, 일행은 돌산 계동마을 인근 도로변에 위치한 해안포 진지를 찾았다. 두릉개 포구 위쪽 도로변 산기슭에 위치한 진지 내부는 80년 가까운 세월에도 여전히 포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튼튼했다.

콘크리트로 지은 벙커형 진지에는 어린아이 팔로 한 아름쯤 되는 긴 해안포가 놓여 있었다. 진지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경은 당시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아름다웠다. 한눈에도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해안포가 돌산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위치해 있다.
 

연대본부 일본군은 교회 주변에 목재로 막사를 짓고 지붕에 검은 콜타르를 칠해 위장했다.
▲ 연대본부 일본군은 교회 주변에 목재로 막사를 짓고 지붕에 검은 콜타르를 칠해 위장했다.
ⓒ 황주찬

 


(주)한국화약 부지 일제강점기 역사유적지로 만들면 어떨까?

일본군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한 뒤 오키나와에 있는 1차 저지선이 붕괴되면 한반도 남단을 2차 저지선으로 삼고자 여수와 거문도에 다양한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그 흔적들이 여수 해안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들 군사시설들을 둘러보는 일도 역사적 의미가 깊으리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일행이 찾은 곳은 계동마을이다. 계동에는 일본군 제2포대와 중포병연대 연대본부가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일본군의 주둔지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해안가에 있는 갈릴리교회 주변이 일본군 주둔지였다. 일본군은 교회 주변에 목재로 막사를 짓고 지붕에 검은 콜타르를 칠해 위장했다.

계동마을 건너편 대미산(359m)에는 일본군들이 파놓은 굴들이 많은데 그곳은 우천관계로 답사하지 못했다. 한편, 대미산 건너 계동마을 반대편에는 굴전마을이 있다. 굴전은 먹는 굴이 많이 생산돼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대미산에 굴이 많아 '굴전(窟前)'이라 불렀고 산 정상부에도 군사시설로 파놓은 인공굴이 세 곳 있어 굴전이라 불렀다.
 

일본 해군 지하사령부 지하공간은 통로가 타원형으로 굽어 있었다. 이는 직사화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일본 해군 지하사령부 지하공간은 통로가 타원형으로 굽어 있었다. 이는 직사화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황주찬

 


일행은 계동을 벗어나 신월동 '여수 항공기지'를 찾았다. 항공기지는 가막만 해안도로와 접한 여수 스카우트 캠프타운 부지 308제곱미터 부지에 있었다. 항공기지 인근 해안에는 수상비행기를 옮기던 활주대(활대)가 아직까지 남아 있고 유도로와 비행기 격납고 흔적도 찾을 수 있다.

특히, (주)한국화약 사내와 인근에는 폭탄과 탄약 저장시설, 지휘 벙커, 연료 저장시설 등 일제강점기 군사시설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이들 시설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면 좋을 듯하다. 현재 (주)한국화약 사내에 있는 일본군 시설들은 군사보호시설이라는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지하사령부 지하사령부 내에는 발전시설과 물탱크도 갖추고 있어 꽤 규모가 큰 부대가 상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 지하사령부 지하사령부 내에는 발전시설과 물탱크도 갖추고 있어 꽤 규모가 큰 부대가 상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 황주찬

 


여수시, 일제강점기 유적에 조금 더 신경 써야

이어 일행은 일본 해군 지하사령부를 찾았다. 이 시설은 여천초등학교 건물 뒤쪽에 있는데 지하벙커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지하공간은 통로가 타원형으로 굽어 있었다. 이는 직사화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하벙커 통로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내부에는 발전시설과 물탱크도 갖추고 있어 꽤 규모가 큰 부대가 상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 여천초등학교 옆 여수시 농업기술센터 정문 옆에는 사령부의 통신을 담당하는 전신소도 지하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전신소 입구 여수시 농업기술센터 정문 옆에는 사령부의 통신을 담당하는 전신소도 지하에 그대로 남아있다.
▲ 전신소 입구 여수시 농업기술센터 정문 옆에는 사령부의 통신을 담당하는 전신소도 지하에 그대로 남아있다.
ⓒ 황주찬

 

 

환기구 전신소는 어른 허리 높이의 환기구가 6개나 있어 상당한 규모의 부대가 주둔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 환기구 전신소는 어른 허리 높이의 환기구가 6개나 있어 상당한 규모의 부대가 주둔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 황주찬

 


전신소는 어른 허리 높이의 환기구가 6개나 있어 상당한 규모의 부대가 주둔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지금 이 시설은 안전상 이유로 폐쇄돼 내부를 볼 수 없다. 전신소를 마지막으로 답사가 마무리 됐다. 여수에는 예나 지금이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군사시설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역사적으로 교훈이 큰 지역을 둘러보는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이라 부른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제주 4. 3평화공원, 국립 5. 18민주묘지, 거제포로수용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이에 해당한다.
 

지하사령부 지하벙커 통로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 지하사령부 지하벙커 통로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 황주찬

 


여수시가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을 잘 관리하면 좋겠다. 이 유적들은 다크 투어리즘에 활용할 만한 훌륭한 관광지이다. 또, 후손들에게는 역사적 교훈을 일깨워 주는 장소다. 고리타분한 이야기 한마디 곁들이자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여수시가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다.

올해 여수시는 관광객 1400만 명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양한 유인책도 마련하고 있다. 다크투어리즘을 활성화 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수 바다와 임진왜란의 찬란한 승리를 간직한 역사유적 그리고 치욕적인 과거를 잊지 않도록 배려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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