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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에 다랭이논 일군 '정치오'의 집념

20여년에 걸쳐 석축 쌓으며 산에서 논농사 지어

  • 입력 2017.04.05 16:41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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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 마을 뒤 다랭이 논의 1~3단 축대 전경.   ⓒ 김배선

[편집자 소개글]
구봉산은 여수의 핵심적인 산 중 하나다. ‘구봉산 이야기’ 필자 김배선(66)씨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저자이다. 다음카페 '조계산 연구소' 운영자이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고, 조계산 주변의 '여수사건' 관련 이야기 수집을 오랫동안 해오기도 했다. 현재 여수문화원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순신광장에서 진행해 온 여수문화원의 '수군출정식' 감독을 맡은 바 있다.

대치마을 뒤 편의 구봉산 자락 다랭이 논 2~ 3단 축대.   ⓒ 김배선

구봉산의 북서쪽 대치마을 뒤편의 큰 골짜기 중간지점에는 예사롭지 않는 규모의 방천(석축)을 쌓아 만든 3단의 경작지가 있다. 골짜기의 이름이 큰터골(大基洞)이므로 ‘큰터골 방천’이라 부른다.

석축의 규모는 하단과 중단은 전면 길이가 35m이고 개울인 좌측면 길이는 15m로서 전장이 50미터에 달하며 높이는 각각 2.4m다. 규모가 가장 큰 상단은 전면의 길이 35m 좌측면 30m로 전장이 65m에 달하며 높이가 3.6m(두길)다.

이러 석축은 약 한길(1.8m)높이에서 15~20cm 깊이의 들여쌓기를 하여 옛날 산속에 높은 축대를 쌓아올려 지었던 규모가 큰 암자터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의 석축이 논을 만들기 위한 상상을 초월한 한 사람의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대치마을노인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맨 윗논 축대 전졍, 지금은 쌀 농사를 짓지 않아 논의 모습은 아니다.   ⓒ 김배선

우리나라 산간의 곳곳을 돌아다녀보면 이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석축을 쌓아 전답을 일군 곳들도 볼 수 있다. 그런 곳들은 모두가 부호나 권세가 또는 사찰 등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축조한 것들이다. 그러나 구봉산의 큰터골 방천은 대치마을에 살았던 ‘정치오’라는 가난한 촌부 한 사람의 논에 대한 갈망과 집념에 의해 이 십 여년에 걸쳐 이루어낸 것이라고 하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정치오 선생은 1885년(경) 대치마을의 가난한 정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으로 성장하면서 타고난 근면과 손재주로 목수 일을 배워 동네목수로 생계를 꾸려가던 그는 나이 서른을 넘기면서 가슴속 깊이 갈망하던 논에 대한 소유의 타오르는 욕망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삼일독립만세의 후인 1922년경 어느 날부터 그는 매일 같이 큰터골로 올라가 쉬지 않고 골짜기의 아름드리 돌들을 굴리고 부수며 축대를 쌓기 시작했다. 공구라고는 지렛대와 메댕이, 정과 망치가 전부이고 흙을 나르는 도구는 가마니때기와 새끼나 칡넝쿨 같은 줄이 전부였으며 일은 오로지 홀로 틈나는 대로 쉬지 않고 하는 사투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외로운 논 만들기는 3년을 넘기고서야 제일 아래 한마지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또 개간은 계속되어 두 번째로 완성한 논이 가운데 배미인 중답이다. 논의 크기는 중앙의 폭이 7m로 가늘고 긴 모양이어서 면적도 100평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중답도 석축의 규모는 하답과 같아 조성기간은 하답과 마찬가지로 3년 이상이 걸렸다.

정치오 선생은 단신으로 7년여에 걸쳐 어마어마한 석축 공사를 했으나 거기서 멈추지를 않았다. 나이 사십을 넘기면서 그야말로 본격적인 큰 공사에 착수했다. 먼저 담을 쌓아 만든 하답과 중답의 입지조건은 담의 높이가 한 길을 조금 넘는 정도에 바닥에 널려 있는 비교적 굵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아 올렸으나 새로 시작하는 마지막 논은 골짜기의 경사가 심해 석축을 한결 높여 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맨 윗 논의 축대 모습. 농사를 짓지 않아 방치되어 있다.   ⓒ 김배선

그렇지만 첫 번째 완성된 논에서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나락을 보며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마음의 부자가 되어 있었기에 중답을 개간할 때도 몸이 으스러지는 고통도 즐거웠고, 다시 시작하는 공사도 오로지 자신의 논을 갖게 된다는 희망 하나로 겁 없이 달려든 것이다.

일 이년에 끝을 낼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미 완성한 논과는 달리 담을 쌓을 돌들을 모으기도 훨씬 어려워 졌으며 두길 가량의 높이로 담을 쌓아 올리려면 하답이나 중답처럼 자연석들로 틈을 맞춰 가며 쌓아 올리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돌을 깨어 형태를 맞추어 쌓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예 그곳에다 풀무간을 만들어 정을 벼려가며 돌을 다듬어 가며 축석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맨 윗논 터. 지금은 텃밭으로 경작하고 있다.    ⓒ 김배선

돌들은 손과 지렛대를 이용하여 굴리거나 썰매를 만들어 옮기기도 하며 매일매일 돌을 나르고 쌓는 끝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축석의 방법은 잔돌끼움 쌓기이다. 그러므로 돌과 돌 틈 사이에 끼워 넣어야 할 잔돌들도 필요하다. 그래서 바지게나 산태미(삼태기)로 잔돌들도 가져 온다. 그러나 잔돌을 골라 넣기 보다는 앉은자리에서 돌을 망치로 적당하게 깨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축대를 쌓는 부분만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산비탈골짜기에 논을 만드는 일은 석축을 쌓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그 공간을 흙으로 매우는 일 또한 어마어마한 공사가 아닐 수 없다. 전면의 축대를 쌓아 올릴 때부터 담처럼 덩그러니 쌓는 것이 아니라 안쪽을 언덕처럼 메워 가며 기대고 쌓아 올라가 일정 높이가 완성되면 안쪽의 넓은 공간을 메워 논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포크레인과 같은 장비가 있다면 흙 메우는 일은 일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담은 쌓는 일 못지않게 돌과 흙을 채우는 일 또한 어마어마한 공사가 아닐 수 없다. 공간을 밑바닥에서부터 바위 돌 자갈 순으로 채우고 마지막을 고운 흙으로 마무리 한다.

흙을 옮겨 나르는 일은 삼태기 바지게가 당시 운반의 기본 도구이다. 그러나 정치오 선생이 주로 운반하는 방법은 헌 가마니를 펼쳐 양끝에 칡넝쿨을 묶어 머리나 가슴(허리)에 둘러 걸치거나 어께에 메어 끌어 나르는 것이다.

약 5년여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한 길 높이로 쌓였을 때 일단 마무리를 하여 현재 면적의 반 정도 되는 크기에 벼를 심어 우선 경작을 해가며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쌓은 축대 모습.   ⓒ 김배선

현재 축대를 보면 한길 높이에서 한자 가량의 들여쌓기를 한 모양을 볼 수 있다. 높은 축대의 축석방식이다 큰터골 방천의 완성까지는 8. 15광복 전까지 했다니 20여년을 걸렸을 것이라며 정치오 선생을 일러 ‘남산(서울)아래 제일의 개간자’라 불렀다 한다.

땅 한 평 없이 가난했던 정치오 선생의 논에 대한 집념은 상상을 초월한 결과를 이루어 냈다. 당시 농부에게 논이란 목숨이나 다름없을 때였다. 그 결과로 인해 남부럽지 않은 가세를 이루어 자손에게 물려주고 81세의 나이로 생을 하직하였다. 물론 그는 행복하였을 것이다. 

아랫 논에는 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다. 이곳은 물이 연결돼 텃밭으로 이용중이다.   ⓒ 김배선

그러나 그가 목숨을 바칠 정도의 상상을 초월한 노력으로 구봉산 계곡에 일궈낸 자랑스럽던 논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도 되지 않아 주인도 바뀌고 놀리는 땅이 되어 혹시나 하는 개발의 기대로 방치되고 있다. 역사적 삶의 교육의 현장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녔음에도 활용되지 못하고 사라지지 않을까 아쉽다.

(위 내용은 2012년도에 대치마을 노인들과 정치오 선생 후손들의 증언을 정리한 것입니다)

맨 아랫 논 축대 전경   ⓒ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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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범 2017-04-06 10:19:31
누구와 어울리느냐에따라,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되고 결정된다,라는말이있다.
지금연재중인,구봉산 이야기의저자 김배선은 구봉산을 이야기하고,구봉산과 어울려서,
자연을 호흡하는,이 지역의 소중한 작가이기도하다.

향토사에 얽힌,지역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엮어나가며, 그곳 지명에따라,가보고싶은곳에서,다시 찾고 싶은곳으로,안내하는 묘한 매력을 느끼게한다.
봄비가 그치면 , 그곳 구봉산 정치오의 집념이 이루어낸 다랭이논을 찾아볼까나........
無 에서 有 를 창조하는 김배선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