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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채의 차담

귀농일기 (16)

  • 입력 2017.04.17 15:38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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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윤

설왕설래하던 좌중의 틈을 타고 한 건달이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빈 소주병을 뒤집어 들고 마이크를 잡는 시늉을 하면서 다짜고짜 노랫가락을 뽑아대기 시작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 ~
이름모를 잡초야 한송이 꽃이라면 ~♬
향기라도 있을텐데 이것저것 ~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 ♪ ~

한판 놀자고 벌인 판에, 부르는 노래에 흥이 겨우는 데야 어찌할 수 없는 일, 처음 몇 구절을 흥취에 젖어 따라 부를 때야 개념 없어 나쁠 것도 없었더니,
그러다가 차츰 야릇한 기미를 감지한, 눈치 팔단, 센스 구단의 건달들은 노랫말 속에 감추어진 이자의 의도를 간파하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바짝 당겨 앉는 것이었다.

- 나는 노랫말이 맘에 들지 않으면 입에 담질 않는 사람이야, 잘 보라구, 인생이란 별 것도 없어, 다 잡초 같은 거야, 잡초!
논밭에 멋대로 난 잡초라고 함부로 뽑는 자들, 나는 이런 자들을 증오하지, 이놈들에게서는 인간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세상에 잡초가 따로 없거든, 엉, 보리, 자네는 스스로가 잡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이자가 이번에는 옆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장문인을 걸고 넘어졌다.

- 한번 생각해 보라구, 벼논에 피가 나면, 사람들은 이 피를 보고서 잡초라 하지,그런데 북부 지방에서는 고산 지대 사람들이 피를 재배하기도 한다고, 들어들 봤는가.

참 희한한 일이지, 우리가 잡초라고 알고 있는 이 피를 재배하게 되면, 그 밭에는 벼가 또 무성하게 나와서 잡초가 되는 거야,
이런 걸 보고, 뭐라고 할 것이냐, 바로 ‘상대주의’ 라 하는 거라고.
내가 사랑하는 보리, 자네는 내말을 충분히 이해하겠지, 응?

하면서, 갑자기 이 건달은 옆에 있는 장문인의 어깨를 껴안다가, 얼굴을 부비기까지 한다.  

사고였다. 별안간에 일어난 사고로 인해, 평소 임기응변에 능한 장문인도 난감하기 그지없는 기색이라,

동성으로부터 예측하지 못한 돌발 키스 세례를 받고서는 그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고,

이런 변태적 상황을 차마 눈 뜨고 보기는 힘들다는 듯, 증인이 된 건달들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평소엔 내성적인 성격에 입을 잘 열지 않는 이 자는, 술을 좋아해서, 먹을 땐 말술을 먹는다. 주님을 모실 때가 가장 행복하다, 면서 해맑게 웃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김 시인 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김 시인의 시는 꼭 집어 말할 만한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장문인은 틈만 나면 지적질을 했었다.

그의 시집을 펴놓고, ‘자궁’이란 말이 들어간 시의 대목을 일일이 찾아내어 김 시인의 눈앞에 들이대고는,

도대체 자네는 무슨 한이 그리 많아서 시어가 이토록 지나치게 한 단어에 깊이 의존하고 있단 말인가, 좋은 시를 쓰려면 어휘력을 넓혀야지, 하면서, 평생 한편의 시도 써보지 못한 자신의 시적 열등감을 감추곤 했던 것이다.

ⓒ 김자윤

산중의 건달들이 간만에 푸는 회포의 자리가 거나한 지라, 좌중의 논두렁 밭두렁 건달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받아온 막걸리는 동이 난 지 오래고, 건달들은 이제 서서히 술판을 걷어내고 차판을 부르고 있었다.

주인장 목수건달은 대중들의 취향을 고려해서, 소장하고 있는 질 좋은 작설차와 황차, 그리고 보이차 등을 내왔고,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다관과 수구, 찻잔들을 정갈하고 질서 있게 차탁 위에 배열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행다의 예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골짝의 저문 해가 붉은 노을빛을 서쪽 봉우리에 드리우고 있었다. 황홀한 노을의 정경이 차탁을 둘러 앉은 건달들의 해맑은 얼굴을 비추니, 제각각의 찻잔을 말없이 바라보는 건달들의 눈빛에선 그윽한 차향 우러나온 물빛의 반향이 아른거렸다.

건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해 저문 노을빛에 붉게 물든 황혼을 사랑했다.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공부하기란 쉬운 일이었으므로, ‘나를 알아 가는 공부’를 인생 공부의 시작과 끝으로 여김으로써,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자연의 말 없는 행위로부터 음과 양의 이법을, 우주적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아와 대아의 지혜를 자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황혼빛에 물든 팽주, 목수 건달의 아우라가 여느 때와 달리 광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차를 우려내고 따르는 건달의 손길은 차분했고 좌중은 고요했다.

마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사제의 손길에서 묻어나는 경건함의 기운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붓다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십대 제자들에 둘러싸여 당신 사후의 일을 당부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장면 같은 것이나 될까.

주인장 팽주가 입을 떼었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는 말이 있지요, 나와 너, 작물과 잡초, 물질과 정신, 안과 밖, 이 모든 분별을 짓는 것은 오직 마음이다, 는 말씀이지요.
저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밖의 모든 대상이 들어와 있고, 뿐만 아니라, 저 밖에 있는 모든 대상에 우리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둘이 아닌 경계에서만 ‘참나’를 찾을 수 있다는 고금의 스승님들의 말씀을 오늘 이 귀한 자리에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제가 여기에 덧붙일 말씀은 따로 없습니다.

ⓒ 김자윤

노을 빛 드리웠던 맑은 찻잔에, 지금은 숨죽인 건달들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는 듯, 좌중은 그 찻잔 속의 잔잔한 수면 위를 일렁이는 잔물결 같은 것이, 혹여 자신들의 마음의 물결을 비추어 그리 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물결은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미풍처럼 출렁거릴 때마다, 높고 낮은 파고를 만들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즉 차와 선이 한맛으로 돌아가는 경계에서, 건달들은 이제 잡초도 잊고, 잡초를 말하는 자도 잊었다.

일미의 경계에서 너도 나도 없고, 같음도 다름도 없었다. 언어가 끊긴 적막한 산채에는 텅 빈 마음 하나 인연의 강물을 표연히 흐르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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