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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역사의 섬 고하도

고하도 역사재조명 학술대회 열려

  • 입력 2017.05.03 00:56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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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8일 오후 두시, 목포시 오거리문화센터에서 열린 고하도역사 재조명 학술대회 모습
▲  4월 28일 오후 두시, 목포시 오거리문화센터에서 열린 고하도역사 재조명 학술대회 모습
ⓒ 오문수

 


4월 28일(금) 오후 2시, 목포시 오거리문화센터에서는 '고하도 역사재조명 기념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에는 관련학자와 목포시민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순신 탄신 472주년을 맞아 열린 학술대회의 주제는 이순신과 역사의 섬 고하도이다. 고하도는 국토를 수호하던 시절의 호국유적과 주권을 빼앗긴 시절의 침탈 유적이 공존한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길목에 자리한 목포는 예로부터 수군진의 요충지이다. 특히 목포 앞바다의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는 고하도는 1597년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던 현장이다.

고하도, 명량해전 이후 조선수군 재건의 터전
 

 고하도 모충각 모습
▲  고하도 모충각 모습
ⓒ 고용규

 


고하도는 목포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목포 앞바다에 위치하고 있는 관문으로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내륙수로인 영산강을 연결하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바다 건너 유달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율도, 장자도, 이달도, 달리도가 서남해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동시에 고하도를 가려주고 있어 탁월한 방어성을 담보해주는 입지환경이다.

명량해전(1597.10.25.)에서 승리한 조선수군은 당장 다가올 겨울을 보낼 장소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견제하면서도 수군력 재건이 급선무였다.

이순신은 승전 직후 고하도에 삼도수군통제영(1597.10.29.)을 옮기는 한편 이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동헌 등 관아건물을 새로 짓고 수군진 운영에 필요한 선소와 군량미를 저장할 창고건물을 지었다. 발표에 나선 한국국제대학교 동북아협력연구소 이상훈 교수가 고하도 통제영설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조선수군 근거지 정착 ▲일본군 동태 관찰과 부역자 처단 ▲군량미 확보 ▲군선의 제조와 무기확보

조선수군, 고하도에서 전력보강해 

고대문화재연구원 고용규 연구위원이 고하도진성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성은 전체 길이 약 1225m 가운데 1105m 가량만 성벽을 쌓고 나머지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거나 높다란 바위 등을 성벽으로 이용했다.

성곽의 평면형태는 부정형이며 '큰덕골저수지' 제방을 제외한 골짜기와 60~80m 정도의 높지 않은 큰산-칼바위-말바위로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하여 포곡식 산성을 쌓아 수군진성으로 이용했다. 1722년에 남구만이 쓴 <고하도유허비>를 보면 이순신장군이 고하도를 선택한 이유가 잘 나와 있다.

"옛날 선조 정유년에 통제사 이충무공이 병란을 맞이하여 병사들과 함께 하였다.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량미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군량미를 비축할 수 있고 전선을 정비할만한 곳을 찾던 중 얻은 것이 나주 고하도이다. 곳곳의 전진에 남은 곡식을 이곳에 쌓게 한 다음 군사를 모집하여 둔에 들게 하고 별장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선조실록> 권 97에는 조선수군이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옮겨(1598.2.16)가면서 수군전력을 증강한 기록이 나와 있다.  명량해전 직후(1597.9.17.~10.28) 병력 1000여명에 판옥선 13척이던 조선수군은 고하도(10.29~1598.2.16.)에서 병력 2000여명에 판옥선 53척으로 늘었고, 고금도(2.17~7.15)에서는 병력 7300여명에 판옥선 60~70척으로 늘어 승전의 기틀을 쌓았다.

호국사적지인 고하도를 관광명소화해야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최성환 교수는 뛰어난 경관과 다양한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 고하도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2012년 고하도와 목포 북항지역이 연결되는 목포대교가 개통되어 고하도를 쉽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많은 목포시민들은 목포대교 개통과 함께 고하도가 이순신의 호국사적지로서 관광 명소화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개통 5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변화가 없습니다. 호국사적지로 개발한다는 논의는 수십년 전부터 들려왔지만 구체적인 노력과 정책실행이 동반되지 못했습니다. 고하도 발전과 역사공원화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기획하고 수렴할 체계적인 방안이 필요합니다."

고하도, 육지면을 최초로 재배한 곳

고하도에서는 육지면을 최초로 재배한 곳이다. 1902년 일본의 목포영사로 부임한 와카마쓰 도사부로는 고하도가 육지면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 재배했다.

 고하도 육지면 발상지비
▲  고하도 육지면 발상지비
ⓒ 최성환

 

 

 1917년 <전남사진지>에 실린 목포면화풍경
▲  1917년 <전남사진지>에 실린 목포면화풍경
ⓒ 최성환

 


이후 육지면 재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목포에는 면공장 25곳, 조면기 600대가 설치돼 일본인들은 1920년대 목포를 '조선의 유일한 면화공업지'라 표현했다. 1924년 목포항에서 수출한 물품 중 쌀은 50.2%, 면화는 42.2%에 달해 목포가 면화의 중심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고하도 감화원 설치

감화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소년범죄자들의 교육을 위한 갱생시설이다. 조선총독부는 1923년 '조선감화령'을 제정했다. 이에 근거해 함경남도 원산에 감화원(영흥학교)을 세우고 두 번째로 설치한 감화원이 고하도 감화원이다.

 감화원터 유적
▲  감화원터 유적
ⓒ 최성환

 


고하도 감화원에는 많을 때는 300여명의 인원이 생활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서 이송되어 왔는데 주로 서울 출신들이 많았다. 감화원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먹는 음식이나 일반 물자들이 외부공급만으로는 부족해서 주변의 논을 경작하기도 했고 과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고하도 감화원에서 생활한 인물가운데는 1980년대 초 고위층과 부자들의 저택을 털면서 물방울 다이아를 훔쳐 대도(大盜)로 유명한 조세형이 있다. 그가 고하도 감화원에서 지냈던 유년기 시절의 기억은 "온갖 몽둥이로 맞던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일제가 만든 고하도 군사용 해안 동굴 
 

 고하도 군사용 해안동굴
▲  고하도 군사용 해안동굴
ⓒ 최성환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 말기에 이르자 일제는 전남 서해안 일대를 군사요충지로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군사용 해안동굴과 방공호를 건설했다. 고하도에는 일제가 건설한 동굴과 방공호가 다수 있다.
 

 고하도에 산재한 유적현황
▲  고하도에 산재한 유적현황
ⓒ 최성환

 


이순신장군이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건설했던 고하도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수탈의 현장이 됐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목포에서는 현재 고하도를 역사유적과 민속문화,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곳으로 여겨 관광지로 개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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