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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초기의 날... 속편

귀농일기(18)

  • 입력 2017.05.05 06:01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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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윤

기계치에겐 꿈같은 유년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누렁소를 몰아 재너머 꼴 베러 가는 길엔, 그날의 과업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우리만의 놀이와 신명이 있기 마련이었다.

잘 갈아진 낫 몇 자루가 비장의 무기라 어쩌다 실수로 손톱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풀 더미를 잘못 건드리다 땅벌들의 공습을 받고 쩔쩔매다가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박제된 동물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벌들의 추격과 맹공을 따돌리기 위해 발칙한 순발력으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위기를 넘긴 적도 더러 있었다.

낫 굴리기를 해서 애써 베어온 풀 따먹기를 하는 등 악동들의 놀이는 그 신명과 발상의 발칙함에 있어 끝 간 데를 모를 지경이었으나, 이 모든 경험과 추억의 시공은 훗날 귀농 귀촌을 향수하게 한 결정적인 동인이 아니었을까.

ⓒ 김자윤

시절을 달리한 지금, 낫은 그 시절의 향수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귀농 초보 시절만 해도 철물점에 들러 쓸 만한 낫을 구하는 기쁨과, 그것으로 풀을 벨 때의 낭만과 행복을 의당 누리곤 했었다.

이제 낫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뒷방 노인네 신세가 된 낫.이 한 자루 물건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애틋할 뿐.

한때의 전장에서 화려한 무용담을 남기고 퇴역한 늙은 장수처럼, 쓸쓸하게 헛간의 모퉁이에서 빨갛게 녹슨 날을 가슴에 안고서 희부연 추억의 안개 속을 미로처럼 헤매다가,
번쩍이며 돌아가는 신병기, 예초기의 날의 위용과 활약상을 목도한 채 숨조차 쉬지 못하는 운명이 되어버린 낫,
이 물건도 바야흐로,인테리어 소품으로 찻집의 벽면을 장식하거나, 박물관의 한쪽 귀퉁이에 내걸리게 될 날이 머잖았을까.

읍내까지 다녀온 다음에야 시동이 켜졌다. 이제 당분간 힘찬 동력을 달고 예초기의 날은 가차 없이 진격을 거듭할 것이다. 유휴지나 논두렁 밭두렁의 지표면을 어지러이 덮고 있는 잡풀들이여 물렀거라, 그 누구도 나의 길을 막을 수 없으리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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