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섬이 항일운동 1번지 였다는 증거는?

사립소안학교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다

  • 입력 2017.05.07 21:51
  • 수정 2017.05.08 16:41
  • 기자명 오문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소안도 모습
▲  드론으로 촬영한 소안도 모습
ⓒ 이재언

 


민족의 섬! 항일운동의 1번지! 항일의 성지로 불리는 소안도를 방문했다. 소안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20.8㎞ 떨어진 섬으로 동쪽에 청산도, 서쪽에는 노화도와 보길도에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멀리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다.

<소안면홈페이지>에 의하면 소안도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섬이름을 달목도라 칭하고 영암군에 배속되었다가 1896년 완도군 설군으로 소안면이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항일의 섬,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씌어진  표지석. 항구에 서있다.
▲  '항일의 섬,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씌어진 표지석. 항구에 서있다.
ⓒ 오문수

 

 

 토지소유권반환투쟁 승리기념비 모습
▲  토지소유권반환투쟁 승리기념비 모습
ⓒ 오문수

 


완도군의 최남단에 위치해 총면적 28.7㎢(여의도의 3배)의 작은 섬으로 체도를 포함한 4개의 유인도와 12개의 무인도로 형성되어 있다. 기후가 온화하고 지형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장구형태(오뚜기 형태)을 이루며 산지가 많고 농수산업을 겸하고 있으나 주소득원은 수산업이다.

해안은 동쪽에 반도처럼 돌출된 부분을 비롯해 곳곳에 소규모 돌출부가 있다. 동쪽과 남쪽 해안은 암석해안이 대부분이며 중앙의 사주와 북쪽 해안에는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대체로 해양성기후를 나타내며 1월 평균기온 2.5°C 내외, 8월 평균기온 25°C 내외, 연강수량 1322mm 정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 보리, 콩, 고구마 등을 재배하며, 근해에서는 멸치, 방어, 민어, 도미, 가오리, 고등어 등이 잡히고 김, 굴, 전복, 미역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항일 선열들의 산교육장인 소안항일운동기념관과 더불어 진산리, 미라리, 부상리 등 3개소의 갯돌 해수욕장과 미라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39호), 맹선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340호) 등이 있어 가족단위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69명의 독립운동가, 20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
 

 소안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개관한 소안항일운동기념관 모습. 드론으로 촬영했다
▲  소안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개관한 소안항일운동기념관 모습. 드론으로 촬영했다
ⓒ 이재언

 


섬 이름이 '소안'이라고 불린 연유가 있다. 1627년 '이진'진에서 제주를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소안도 월항리를 거쳐 오가도록 했다. 이진에서 소안 사이는 내해라서 바다가 잔잔했으나 제주와 소안 사이는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리다가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쳤다.

또한 섬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기개가 용맹함으로 외부인들로 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여겨 '바' 소(所), '편안' 안(安) '섬' 도(島)를 써 '소안도'라 불렀다.

<완도향교>지에 의하면 소안도는 대일항쟁시절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거세게 항일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구국운동을 펼치고 독립군자금 모금과 노동자,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 소안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조국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곳이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주역은 송내호와 김경천, 정난국 등이다. 이들이 조직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씨앗은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
 

 소안도 항일운동의 싹을 틔운 사립소안학교모습. 2005년에 복원했다
▲  소안도 항일운동의 싹을 틔운 사립소안학교모습. 2005년에 복원했다
ⓒ 오문수

 

 

 소안도 인근 당사도에 설치한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한 사건은 소안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념관에 있는 당사도등대 습격사건 모형도
▲  소안도 인근 당사도에 설치한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한 사건은 소안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념관에 있는 당사도등대 습격사건 모형도
ⓒ 오문수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이끄는 동학군이 소안도로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고 주민들은 동학군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하지만 동학혁명이 실패해 몇몇 주민이 청산도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이순찬, 이준화는 도피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이 인근 당사도에 등대를 설치하자 1909년 이준화 외 5명이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했다. 당사도 등대사건은 소안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소안의 교육과 정신이 항일과 구국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동학의 영향과 함께 소안도 항일운동의 기반은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였다. 중화학원은 송내호, 김경천 등이 설립했는데 사립소안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소안도 주민들은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한 매국노 이기용으로부터 토지를 되찾기 위해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2년 2월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사립소안학교를 세웠다. 소안학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이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이 몰려왔다고 한다.

소안이라는 작은 섬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난 이유가 궁금해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인 이대욱씨에게 이유를 들어보았다. 그가 설명해준 내용을 요약했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대욱씨 모습
▲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대욱씨 모습
ⓒ 오문수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대욱씨가 노란무궁화를 가리키고 있다. 노란무궁화는 소안도가 원산지로 바닷물에 뿌리가 닿아도 죽지 않고 병충해에 강하며 생명력도 강하다고 한다.  전국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대욱씨가 노란무궁화를 가리키고 있다. 노란무궁화는 소안도가 원산지로 바닷물에 뿌리가 닿아도 죽지 않고 병충해에 강하며 생명력도 강하다고 한다. 전국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 오문수

 


▲인근섬인 거문도로부터 신식학교의 영향 받음 ▲양반과 지주층이 없어 주민 상호간 갈등소지 적음 ▲ 한말 토지회수 투쟁을 통한 단결력 강화 ▲일찍 신교육을 시작해 의식수준 향상 ▲ 지리적으로 중요한 항로에 위치해 외부정보와 근대문명에 일찍 눈뜸

감옥에 있는 사람들 생각해 추운 겨울에 이불도 덮지 않은 주민들

1924년 2차 소안 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주민들이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1920~1930년 소안도 관련기사만 200건이 넘고 기사에 등장한 인물도 수백명에 달했다.   

주민들은 일제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동맹'이나 일장기 걸지 않기, 일본 국경일 행사 거부 등으로 일제 폭압에 맞섰다. 또한 각종 행사 때 일본 경찰의 입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항일운동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는 기록이 말해준다.

1920년 6천여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을 일컫는다. 일제는 결국 1927년 소안학교를 폐쇄해버렸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 뒤편에 사립소안학교가 보인다.
▲  소안항일운동기념탑 뒤편에 사립소안학교가 보인다.
ⓒ 오문수

 

 

 소안항일운동 주역인 송내호, 송기호 형제와 부친을 모신 묘역 모습
▲  소안항일운동 주역인 송내호, 송기호 형제와 부친을 모신 묘역 모습
ⓒ 오문수

 


해방 후에도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은 숨죽이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항일 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복권됐고 최근에야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소안면은 일제 강점기에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선열들을 추모하고 항일정신을 계승하고자 365일 나라사랑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각 가정은 물론 거리, 공원 등에는 1100여개의 태극기가 365일 휘날리고 있다.
 

 소안도 주민들은 항일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365일 나라사랑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소안도에서는 가정은 물론 거리, 공원 등에 1100여개의 태극기가 365일 휘날리고 있다.
▲  소안도 주민들은 항일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365일 나라사랑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소안도에서는 가정은 물론 거리, 공원 등에 1100여개의 태극기가 365일 휘날리고 있다.
ⓒ 오문수

 

 

 섬사랑 1호 오른쪽에 소안농협에서 운영하는 '대한호'가 보인다. 소안농협에서는 '대한호'와 '민국호'외에 '만세호'도 운영한다. 소안도 주민들의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증거다
▲  섬사랑 1호 오른쪽에 소안농협에서 운영하는 '대한호'가 보인다. 소안농협에서는 '대한호'와 '민국호'외에 '만세호'도 운영한다. 소안도 주민들의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증거다
ⓒ 오문수

 


소안농협이 운영하고 있는 화흥포, 노화, 소안간을 운항하는 여객선 이름도 유별나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인 이대욱씨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는 현재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남해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전국 섬을 돌아다녀보면 거의 모든 학교가 사라지고 통폐합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섬에 들어오는걸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교육문제다. 사립소안학교가 소안도 주민을 각성시킨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