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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기 거북해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뀐 섬

소안군도 끝자락 당사도, 소안도 항일운동에 불씨 당기기도

  • 입력 2017.05.08 16:37
  • 수정 2017.05.08 16:41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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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론으로 촬영한 당사도 모습
▲  드론으로 촬영한 당사도 모습
ⓒ 이재언

 


소안군도 끝자락에 있는 당사도를 방문했다. 당사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완도군 소재의 보길도·소안도· 노화도· 횡간도 등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룬다.

동경 126°36′, 북위 34°06′에 위치한 섬은 완도군청에서 직선거리로 30.8㎞, 소안도 남서쪽 5㎞ 지점에 있다. 강아지가 뛰어가는 모습을 한 당사도는 면적 1.46㎢, 해안선 길이 8.0㎞의 조그마한 섬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연평균기온은 14.3℃, 1월 평균기온은 1.92℃, 8월 평균기온은 25.1℃, 연강수량은 1282㎜이다. 해안은 암석해안을 이루고, 등대가 위치한 섬의 남동쪽 해안에는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당사도 마을 모습이 정겹다
▲  당사도 마을 모습이 정겹다
ⓒ 오문수

 

 

 골목길 모습에서 고향생각이 떠올랐다
▲  골목길 모습에서 고향생각이 떠올랐다
ⓒ 오문수

 


섬 중앙부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구릉이 형성되어 있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40여명의 주민이 사는 섬에는 태양광발전소가 있어 전기는 모자라지 않는다. 서울에 살다 11년 전에 당사도에 온 김현옥씨가 섬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11년 전 당사도에 들어올 때는 양식장이 없었는데 소안도에서 당사도까지 오는 길목에 양식장이 많이 생겼어요. 주로 김, 미역, 다시마, 톳을 양식해요. 처음에는 서울이 좋았는데 요사이 서울에 가면 공기가 안 좋아 힘들어요. 당사도는 특히 공기, 물, 산이 좋아요. 

불편한 점은 보건소가 없어 병이 나면 힘들어요. 서울 살다 섬에 이사왔을 때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섬사람들이 굉장히 배타적입니다. 주민 대부분이 친인척관계로 맺어져 있어요. 옛날에 교통이 불편해 노를 젓는 전마선으로 통행했기 때문에 외지인들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주로부터 섬을 사들여 마을 주민들을 해방시킨 김석주
 

 해남 천모씨로부터 섬을 사들여 섬주민들로 하여금 소작의 노예생활을 면하게 해준 김석주씨의 공로를 기려 주민들이 세운 '김석주 공 찬송추모비'가 마을 정자 옆에 세워져 있다
▲  해남 천모씨로부터 섬을 사들여 섬주민들로 하여금 소작의 노예생활을 면하게 해준 김석주씨의 공로를 기려 주민들이 세운 '김석주 공 찬송추모비'가 마을 정자 옆에 세워져 있다
ⓒ 오문수

 


'섬사랑 1호'를 타고 당사도항에 내려 녹음이 우거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마을 중앙에 예쁜 정자가 있고 오래된 비석이 하나 보인다. 비석 정면에 적힌 '김해인 고 김석주 공 찬송추모비' 뒤쪽에 공덕비의 내용이 있어 읽다가 이웃한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비문에 적힌 김석주씨를 아느냐?"고 묻자 "우리 할아버지예요"라며 "비문의 내용이 맞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1973년 8월 15일 자지리(者只里) 동민일동"이라 적힌 비문 내용이다.

"오호라 김공은 일제 압정시에 해남 천모씨의 개인 소유였든 자지도(者只島)를 매수하기 위하여 7개성상 노고 중 지주로부터 서기 1941년 8월 15일자 사드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동민 각개인 사유재산으로 만드려 지주로부터 소작의 노예생활을 면케한 그 공을 동민은 추모하고 천추만대 영세불망코저 김공의 찬송비를 건립하나이다."  

듣기 거북한 섬 명칭으로 세 번이나 개명한 당사도

비문의 내용을 보면 김석주씨가 섬을 사들여 주민들에게 나눠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주머니 얘기에 의하면 김석주씨는 40대 초반에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비문에 나오는 섬 이름이 듣기 거북해 마을 노인에게 확인해 보았더니 명칭을 세 번이나 바꿨다. 


원래 자지도(者只島)또는 자개도(者開島)라 불렀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소안도 맹선리에 소규모 군항을 구축하고 '항구의 문'이라 하여 '항문도(港門島)'라 불렀다. 해방이후 '자지도'란 이름을 되찾았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1980년대 들어와 당사도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마을에서 등대로 가는 길옆에 세워진 당집 모습이 특이하다. '1970년 3월 24일 준공'이란 글귀가 있어 마을 주민에게 확인한 결과 당집이 맞다고 한다. 섬을 돌며 수많은 당집을 보았지만 처음보는 형태이다
▲  마을에서 등대로 가는 길옆에 세워진 당집 모습이 특이하다. '1970년 3월 24일 준공'이란 글귀가 있어 마을 주민에게 확인한 결과 당집이 맞다고 한다. 섬을 돌며 수많은 당집을 보았지만 처음보는 형태이다
ⓒ 오문수

 

 

 엄마소와 송아지 모습에서 어릴적 생각이 떠올랐다
▲  엄마소와 송아지 모습에서 어릴적 생각이 떠올랐다
ⓒ 오문수

 


당사도(唐寺島) 이름의 연유는 해상왕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통일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해진에서 당나라를 왕래하던 선박들이 날씨가 좋지 않으면 섬에 기항해 당나라 절에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고 하여 1982년에 당사도로 개칭하였다.

섬 명칭 때문에 재미있었던 일화가 있다. 1976년도 소안중학교에 근무했던 김아무개 교사의 얘기다.

"당시 면민 체육대회 종목 중 동리대항전이 벌어져 각 섬출신 주민들이 자존심을 걸고 응원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사도 (당시 자지도) 아주머니들이 열띤 응원전을 벌이면서 '우리 자지 이겨라! 우리 자지 이겨라!'고 응원하자 운동장에 있던 면민들이 웃느라 배꼽 빠졌어요. 남자들이라면 좀 이해하겠는데 여자들이 악쓰며 응원해서요."
 

 누군가의 집 유리창에 전복껍질로 붙여놓은 모습이 예뻐 한 컷
▲  누군가의 집 유리창에 전복껍질로 붙여놓은 모습이 예뻐 한 컷
ⓒ 오문수

 

 

 당사도 등대로 가는 길 옆에는 누군가의 묘지가 있었다. 특이한 점은 묘지 주위로 빙둘러 돌담이 쳐져있고 출입구 부분은 V자로 파여있었다. 이런 묘지는 제주도 우도의 묘지와 비슷하다
▲  당사도 등대로 가는 길 옆에는 누군가의 묘지가 있었다. 특이한 점은 묘지 주위로 빙둘러 돌담이 쳐져있고 출입구 부분은 V자로 파여있었다. 이런 묘지는 제주도 우도의 묘지와 비슷하다
ⓒ 오문수

 


마을을 돌아보고 나서 주민이 안내해준 길을 따라 당사도 등대탐방에 나섰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30여분을 가는 동안 좌우를 살펴보니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신록의 푸르름 속에 산새가 울고 마을 주민들의 묘소가 보인다. 사방을 둘러봐도 바다가 안 보여 여기가 섬이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산 정상부를 넘어 평평한 곳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살았던 돌담들만 남아 쓸쓸함을 준다. 옛사람의 흔적을 되돌릴 방법은 없을까?

조금 더 가니 저멀리 높이 솟은 등대가 보이고 시멘트도로가 나왔다. 예쁜 등대모습을 촬영하고 있으려니 사무실에서 사람이 나와 "웬일로 오셨냐?"고 묻는다.   

100여년 역사의 당사도 등대,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
 

 당사도 등대 모습으로 오른편에 약간 보이는 등대가 일제강점기 시절에 설치한 등대다. 1909년 1월 소안도 출신 이중화외 5명이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했다. 소안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된 등대이다.
▲  당사도 등대 모습으로 오른편에 약간 보이는 등대가 일제강점기 시절에 설치한 등대다. 1909년 1월 소안도 출신 이중화외 5명이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했다. 소안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된 등대이다.
ⓒ 오문수

 


당사도항로표지관리소 부소장인 김영선씨가 아스라이 보이는 제주도와 추자도를 가리키며 당사도등대가 중요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당사도등대가 유인등대인 이유는 제주해협을 관장할 뿐만 아니라 동서남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항로이기 때문입니다. 당사도등대는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해양수산부 등대문화유산 제21호로 지정된 등대입니다."
 

 1909년 1월 소안도 출신 이준화 외 5명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항일전적비'(오른쪽) 옆에 죽은 일본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일인들이 세운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일인들이 세운 추모비는 파괴돼 버려졌다가 나중에 찾아 세웠다
▲  1909년 1월 소안도 출신 이준화 외 5명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항일전적비'(오른쪽) 옆에 죽은 일본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일인들이 세운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일인들이 세운 추모비는 파괴돼 버려졌다가 나중에 찾아 세웠다
ⓒ 오문수

 


당사도 등대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1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기반시설 확충 및 자국 상선의 항해를 돕기 위해 설치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지만 실패하자 소안도에서 동학군에 협력했던 이준화외 5명이 1909년 1월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타살하고 시설물을 파괴했다. 당사도등대사건은 소안도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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