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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90여 명 배출한 완도의 작은 섬

목포대학교에서 도서문화원 주최 '섬의 인문학 콘서트' 열려

  • 입력 2017.05.16 16:44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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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영화, <소안의 노래> 표지 모습
▲  다큐영화, <소안의 노래> 표지 모습
ⓒ 오문수

 


11일(목) 오후 4시, 목포대학교 70주년기념관 정상묵국제컨퍼런스룸에서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제2회 섬의 인문학콘서트가 열렸다. '다큐영화, 소안의 노래'란 주제로 열린 인문학콘서트에는 소안도 주민들과 학생 100여 명이 참석했다.

러닝타임 80분짜리 <소안의 노래>는 다큐멘터리로 2015년 광주독립영화제 개막작이자 2016년 부산평화영화제 본선경쟁부문에 올라 '드넓은푸른공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완도의 작은 섬 소안도는 일제가 토지를 빼앗아 송내호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 등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곳이다. 또 일제 잔재가 청산이 되지 않은 혼란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섬주민들을 질곡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이 당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 콘서트홀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이 인사말을 건넸다.
 

 다큐영화, <소안의 노래>를 보기위해 100여명의 관람객이 모였다
▲  다큐영화, <소안의 노래>를 보기위해 100여명의 관람객이 모였다
ⓒ 오문수

 


"소안도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성지였던 곳입니다. 엄혹한 식민지 시대에 섬 주민들이 똘똘 뭉쳐 친일지주를 물리치고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습니다. 소안도 내에서 일제의 강점에 항거하였고 소안도를 벗어나 서울, 광주, 만주, 일본, 중국 등지에서도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당시 소안도 사람들은 독립과 항일을 가슴에 새기며 민족해방가, 독립군가, 애국가 등의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김경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것은 평화포럼에서 소안도 문학행사 소식을 들으면서부터다. 그녀는 "어떻게 저런 작은 섬에서 큰 저항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2008년 그녀가 소안도에 들어와 처음 만나게 된 어르신이 김남천씨였다. 김남천씨가 항일운동을 한 형님 외에도 최형천, 정남국 선생님 등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한 것에 매료됐다. <소안의 노래>에는 영화를 찍을 때 살아계셨지만 영화가 완성됐을 때 고인이 된 김남천씨의 모습이 나온다.
 

 다큐영화, <소안의 노래>를 만든 김경자 감독 모습
▲  다큐영화, <소안의 노래>를 만든 김경자 감독 모습
ⓒ 오문수

 


"그때 상당히 선생님들이 상당히 열심히 가르쳤어요. 절대 자기만 알고 그래서는 안 된다. 신광희씨 같은 분은 완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세상만 해도 완도읍 백정들에게 좋은 말 하는 사람들이 없었더래요. 아조 성격이 파랏파랏했는데.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 원칙 꼭 지키고."

<완도향교>지에 의하면 소안도는 대일항쟁시절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거세게 항일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구국운동을 펼치고 독립군자금 모금과 노동자,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 소안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조국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곳이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주역은 송내호와 김경천, 정난국 등이다. 이들이 구성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소안도만의 노래 <이별가>

소안도에선 노래를 통해 항일의식을 드높였다고 한다. 소안사립학교 선생님들이 중심이 되어 가르친 노래는 <행진가><독립운동가><옥중가> 등이다. 소안도는 노래와 소중한 인연이 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이시완 선생님이 작은 섬에서 엄청난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걸 보고 기자직을 버린 채 섬으로 들어왔다. 그는 소안학교 교사가 되어 계몽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소안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떠나야 되는 상황이 생겼다. 그때 <이별가>를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주민인 박대님(83세), 김영애, 김중배씨가 함께 부른 <이별가> 가사 내용이다. 
 

 소안도에서 불렸던 항일의 노래 여러편을 기억하고 계시는 박대님(왼쪽)씨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는 김영애(중앙), 김중배(우측)씨 모습. 김중배씨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7살 때 어머니가 재가한 후 힘들게 살았다.
▲  소안도에서 불렸던 항일의 노래 여러편을 기억하고 계시는 박대님(왼쪽)씨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는 김영애(중앙), 김중배(우측)씨 모습. 김중배씨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7살 때 어머니가 재가한 후 힘들게 살았다.
ⓒ 오문수

 


"떠난다 떠나간다 나는 가노라
세월에 꽃동무를 남겨 두고서
소안에 뭉게뭉게 피는 꽃송아
아무리 아픈 폭우 심할지라도
님 향한 일편단심 변치 마시오"


90여 명 항일운동가를 배출, 전쟁 때 희생자 250명 생겨

한국전쟁 당시 소안도는 작은 규모에 비해 큰 피해를 입었다.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의 설명이다.

"소안도의 피해가 가장 컸는데 그것은 일제시기에 항일운동이 가장 드셌던 곳이고 사회주의운동이 드셌던 곳이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아무래도 좌파 활동에 많이 참여하게 된 겁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숫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많이 참여하게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많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완도 전체에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약 10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 중에서도 소안도가 가장 피해가 심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이것은 어쩌면 냉전, 분단과 냉전, 전쟁이라고 하는 현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 희생자였던 아버지를 둔 김중배씨는 2001년도부터 전쟁전후 희생자 기초조사를 해왔다. 김중배씨 나이 3살 때 아버지가 총살당했고 7살 때 어머니가 재가했다. 그 후 목포 이모집으로 간 그는 중앙초등학교 다닐 때 신문배달을 하며 배가 고파 친구 도시락을 훔쳐 먹기도 하며 학교를 졸업해 33년의 공직생활을 마쳤다.
 

 <소안의 노래> 영화상영 후 대담을 마친 이들이 기념촬영했다
▲  <소안의 노래> 영화상영 후 대담을 마친 이들이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소안의 노래> 인문학 콘서트에는 소안 항일운동 주역인 송내호씨 가족들이 참석했다.
▲  <소안의 노래> 인문학 콘서트에는 소안 항일운동 주역인 송내호씨 가족들이 참석했다.
ⓒ 오문수

 


"실태조사를 해보면 6.25전후해 국가폭력으로 소안도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250명 정도 됩니다. 오늘 한 편의 영화가 물속에 잠겨있는 소안을 수면 위로 떠올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대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받아 적으나마 보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효도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학생 여러분 부모님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효도하십시오."

한 번도 효도를 해보지 못했다는 김중배씨의 얘기가 소안의 아픔을 대변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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