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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의 철학에 관하여

귀농일기 (21)

  • 입력 2017.06.12 16:32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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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극, 천지인...天間(時間), 地間(空間), 人(人間) 3간.
생태적 관점, 땅은 생명의 세계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점, 공동체의 구성원
영성(spirituality)에 관한 담론이 요구된다.
귀농은, 우리 안에 모셔진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조화와 통합

ⓒ 김자윤

나는 귀농 귀촌자의 철학과 삶의 방식에 있어 세 가지 관점과 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나의 우주론적 인간관의 중심을 꿰는 삼태극(三太極)에 관련되어진다.

삼태극이란 천 지 인을 하나로 통섭하는 동아시아 전통의 우주관이다.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린 우주는 온전한 전체, 온전한 하나로서의 관계망이다. 태극의 관계망을 나누어 풀어내니 天間(時間), 地間(空間), 人間의 삼간이 된다.

이 삼태극, 즉 삼간은 변화와 생성을 자기 안에 통섭하여 창발적이고 진화적인 맥락을 따라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히 유전한다. 그리고 그 관계적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사람인 까닭이다.  

첫째 생태적 관점이다.

천 지 인 三間 중에 地間의 문제가 바로 이 생태철학의 내용을 구성한다. 사람이란 무릇 땅의 자양을 받고 먹고 산다. 땅은 생명체를 낳아주고 길러 준다. 나의 육신을 생장시키고 부양하고 지탱하는 것,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땅의 문제이다. 이 땅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자세를 갖는 것은 환경 철학을 담론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땅은 어머니인 지구이다. 우리가 섭취하는 모든 유형의 자양은 이 땅이 낸 소산이다. 만물은 땅의 은덕으로 나오지만 그 만물이 다시 땅을 이루는 식구들이다. 땅은 죽은 광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땅은 생명의 세계다. 만물의 그물로 잘 짜여진 생명간의 네트워크이다.

땅의 성분 어떤 것도 이 우주의 태극을 그 안에 모시고 있지 않음이 없다. 지극히 작은 티끌 하나에도 온우주가 숨쉬고 있음이다.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모셔져 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화엄의 철학이 이를 잘 웅변해준다.

그러므로 생태적 관점이란 우리에게 생명을 기르고 부양하는 생태적 조건과 환경에 대한 철학적 입장을 종용한다.

흙, 미생물, 지렁이, 효소, 두더지, 뱀, 쥐, 야생동물, 새들, 곤충들, 벌래들, 익충과 해충, 비료와 농약과 제초와 성장촉진제, 유전자 변형, 방사능 검사 등 우리의 몸과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지는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생태적 관점 안에 통섭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둘째,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점이다.

삼간 중 人間의 문제에 관한 철학과 관련되어진다. 다시 말해 인문주의적 철학의 문제가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우리가 사는 관계망은 인간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조건을 벗어나지 못 한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으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간(人間)은 間적, 관계적 존재이다. 관계 즉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고 자라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문에 관련된 모든 지식과 지혜의 유산도 이 공동체로부터 유전되어 계승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스스로 관계 맺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 자유와 책임, 공(功)과 과(過)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적인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농촌이든 산촌이든, 마을 안에 살든 마을 밖에 따로 살든, 사람 간에 나눔과 연대의 정을 소홀히 하고서도 ‘행복의 문’에 달도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귀농자의 철학과 윤리의 문제 또한 이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농촌이나 산촌은 인간사회, 인간의 문명, 인간의 역사 밖의 어떤 지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자적 삶의 양식’으로 그려지고 있는 귀농이란 오히려, 작금의 문명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통째로 갈파하고 넘어서는 초월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 문명을 끌어안고 창진적으로 나아가야할 어떤 소명의식까지도 담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은(隱)과 현(顯) 사이의 중용(中庸)의 지대가 하늘과 땅이 교섭하는 그곳, 바로 인간의 지대에 놓이게 된다. 내재적 도와 초월적 도가 둘이 아닌 상태로(不二) 융합되는 바로 그 경계가 즉, ‘나의 현존’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말한다.
“도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道不遠人).”[중용, 제13장]    

ⓒ 김자윤

셋째, 영성(spirituality)에 관한 담론이 요구된다.

영성이란 우리의 삶에 가장 근원적이고 본원적인 하늘의 경계, 즉 天間에 관한 철학적, 사상적 맥락을 일컫고 있다.

영성이라면 우선 종교적 영성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종교적인 벽과 한계를 넘어서 탈종교적인 영성, 통합의 영성, 실천적 영성의 시대로 나아가야함을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혹자는 말한다. 21세기는 지식과 정보의 세기요, 환경의 세기요, 문화의 세기며, 영성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관심하는 바의 궁극은 다가올 시대의 정신의 맥락을 선도하게 될 영성(spirituality)에 놓이게 된다.

우리 동아시아 전통의 언어로 말하면, 영성은
虛 즉 空, 텅 비어 있으니 공하고
空 즉 通, 공하니 천 지 인 만물에 통하여 하나(一)가 되고
通 즉 靈, 통하니 신령의 묘용(妙用)이 실상의 세계에 그득하고
靈 즉 智, 신령하니 그로부터 나오는 밝은 지혜가 우리의 마음과 온 누리에 화안하도다.

중용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음미해보는 것이 영성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더욱 바르고 온당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김자윤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우리의 내면의 ‘본성’이라 하고
率性之謂道,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말해서 ‘道’라고 하며
修道之謂敎, 도를 닦는 것을 일컬어 ‘가르침(敎)’이라고 한다.
 [중용, 제1장]

귀농이라 함은 외적 형태로는 ‘農적 삶의 양식’(땅의 양식)을 수용하지만, 내면으로는 그 속에 모셔진 하늘(天)을 발견하고 깨닫고 수행하는 ‘영적, 정신적 삶의 양식’ 전반을 오로지하는 데 그 참된 미덕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농은 내 안에 모셔진 하늘(天)을 온전히 깨닫고 받들어,
하늘을 내면에 담지한 벗들과의 돈독한 우정과 공동체의 문화(人)를 창달함과 아울러
우리가 깃들어 살고 있는 땅의 터전(地)을 잘 가꾸고 보존함으로써
우리 안에 모셔진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조화와 통합이
우주적 창조와 진화의 큰 흐름을 타고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원대한 사건에 동참하는 우리의 지극한 삶과 사랑,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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