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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의 나무

  • 입력 2017.07.08 17:16
  • 수정 2017.07.10 17:03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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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바위 밑의 심박골 밤나무 거목

햇살이 따가운 한여름 구봉산은 하늘을 가린 녹음에 등산로와 둘레길 모두 햇볕 걱정 없이 걷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행복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훌쩍 자란 나무와 숲이 여수의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향해 시원스럽게 열린 시야를 가려 아쉽기도 하다.

텃골 약수터 뒤 소나무 거목

구봉산의 숲이 이렇게 우거진 것은 언제쯤부터였을까? 6. 25 한국전쟁이 끝나고 산림녹화가 진행되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구봉산은 거의 나무가 없는 민둥산 이었다. 그러므로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은 격세지감에 온 국민이 몸으로 실천한 산림녹화의 과정을 보람의 추억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구봉산의 나무들이 지금처럼 푸름을 되찾은 과정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헐벗은 구봉산 조림과 치산, 특별한 고목 등으로 나누어 차례로 실어 보고자 한다.

텃골약수터 뒤편 수림

우리고장 수림의 옛 모습

우리의 국토는 산이 70%를 차지하기 때문에 인구가 많지 않던 옛날에는 어느 곳이나 푸른 숲에 둘러싸인 나라였다. 그래서 우리고장역시 거목이 숲을 이룬 해안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흔적이 있다 . 

조선시대 금오도는 황장목(소나무)을 보호하는 봉산(封山) 구역으로 섬을 뒤덮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궁궐이나 판옥선을 건조하는 목재조달 지였다는 기록이 있고, 가(까)막만이라는 이름은 주변이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바다가 검게 보였기 때문이라는 나무와 관련된 어원이란 얘기도 전해오며, 지금은 안도 서고지 항에만 몇 그루의 수백 년 고목이 아름다운 풍광으로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여수의 해안과 섬들 곳곳에 그런 숲이 많았다고 하니 여수는 수림으로 넘쳐 났던 고장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한산사 대웅전 뒤편 고목

헐벗은 우리의 산

산림녹화의 성과가 나타나기 전인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모든 야산은 그야말로 헐벗은 모습이었다. 구봉산도 남쪽은 신월동에서 봉강동까지 한산사 주변을 제외한 전체가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국토의 산림이 급격하게 황폐화되어버린 일제강점기부터 6. 25전쟁이 끝난 직후까지의 주요원인과 상황을 돌이켜보면
첫째 인구증가로 인한 연료용 나무수효와 산간경작지의 개발급증
둘째 6. 25전쟁기간 중 전시 작전을 위한 대단위산림방화와 대대적인 벌목
셋째 산림보호에 대한 자각조차 할 수 없었던 혼란한 국가의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원인들에 휩싸이게 된 우리는 겨우 한 세기 남짓한 기간에 전국토의 산림이황폐화된 것을 자력복원이라는 세계사적 경험을 한 국민이 되었다. 그렇다면 산림의 폐허가 절정이었던 6.25 이후 산림녹화가 시작되던 1960년대 초까지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전국이 전후복구를 위한 목재의 수효가 급증하자 그동안 지켜져 왔던 소나무는 권력자들을 등에 업은 허가받은 벌채업자들에 의해 싹쓸이 벌채(산판)가 이어졌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참숯구이는 다시 시작되어 참나무가 베어졌으며 대부분 산이 없는 국민들은 집을 짓고 연료를 얻기 위해 나무를 구하는 것이 생존 그 자체였으므로 그야말로 나무를 지키기 위한 도벌과의 전쟁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50~60년대를 살며 나무를 다녔던 사람들은 ‘산감’을 피해 숨바꼭질하느라 불안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말 무서웠던 사람은 순사는 옛말이고 산림계와 세무서직원이었는데 그들이 떴다 하면 집집마다 생솔가지와 밀주를 숨기느라 허둥대고 해당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오금을 저렸다고 했다

구봉산 남쪽 산림

지난날의 나무와 숲을 보여주는 흔적

우리말에는 ‘말림갓’이라는 표준어가 있다. 말림(남이 하는 짓은 못하게 밀리다)과 가(가장자리)의 합성어로 나무나 풀은 베어가지 못하도록 말리는 구역이라는 뜻으로 나라와 사찰 고관부호들이 독차지한 산을 서민백성들로부터 지키려는 데서 생겨난 우리만의 아주 특별한 말이다.

그러므로 반도 전체가 야산인 여수는 사찰과 문중 그리고 몇몇 개인소유의 지키는 산이 아니면 나무가 부지할 수 없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목으로 옛날의 숲을 유추해 볼 수 곳은 흥국사 경내 주변으로 여수에서 가장 큰 영취산에는 여러 기의 참숯구덩이가 있다.

다음은 종고산 정상부근과 만성리 중촌 안쪽에 몇 그루 소나무 고목이 있었다. 구봉산에는 남쪽으로 한산사 입구 주변과 이강(관)산 입구 갑부의 저택(瑞興門)까지 이어진 흔적으로 중간(약수닭집 밑)의 길옆에도 몇 그루의 고목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텃골 정 부자의 소유였던 약수터 뒤편 숲속에 몇 그루의 고목이 섞여 있으며 소나무 거목의 둘레는 2m가 넘었다

이강산 서흥문 주변 고목

 

구봉산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득했었다

애국가에도 나오듯이 우리나라는 소나무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구봉산에 소나무가 많은 것은 당연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구봉산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관하여 자세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분은 흔치 않았다. 이유는 사라진지가 60년이 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남쪽에는 원래 나무들이 거의 없고 반대편인 북쪽에만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치마을 뒤편 넓은 산비탈에 펼쳐졌었다는 당시 소나무에 대한 노인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해방 후에 동각(마을회관)을 지을 때 거기 소나무를 베어다가 지었거든.”(서성인 88)

“심박골 우리 산에도 소나무가 많았는데 봉강동은 나무가 없으니 밤이면 젊은 사람들이 원정을 와서 베어 놓고 몰래 져 가는데 들키면 도망가지만 쌈이 벌어질 때도 있었지”(서장철 82)

“지서나 산림조합 사람들이 많이 주라글기도 했제”

“송충이 약을 비행기로 쳤는데 그때 많이 죽어 버렸지”(서장철)

“깨맷등 아래 밤나무 밭에 있던 것은 나무장사들이 사서 베어 갔어” (박영희 78)

구봉산 북쪽의 잡목림

그러나 지금은 소나무뿐만 아니라 잡목들까지도 그때 수준으로 성장하여 숲을 이루었지만 이제 산에 오를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린 노인들은 당시 산의 주인이었던 소나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젖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텃골약수터 뒤편 꽃뜰방 상단 옛 경작지

구봉산을 점령했던 경작지의 모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산 아래는 경작지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요즈음의 텃밭 문화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수단으로 일구는 밭은 성격이 다르다. 산간경작지 개간이 늘어난 것은 빈곤과 산림의 축소를 의미 한다. 구봉산에는 일제강점기 최고조에 이르렀던 경작지의 흔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대치 큰까끔 계곡의 둘레길 부근으로 이어지는 경작지

가장 높이 있는 곳은 북쪽이며 텃골사람들이 꽃뜰방이라 불렀던 텃골과 연곡약수터 뒤 편 비탈과 계곡 전체에 계단식 다랑이의 자취가 봉우리 바로 아래까지 남아 있으며 같은 봉우리를 두고 큰까끔이라 불렀던 대치 쪽은 마을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개간한 다랑이가 현재 둘레길 까지 이어져 있으며 봉우리 바로 밑 잔디밭 높이까지 작은 평지라도 깎아 만들어 지은 흔적이 지금도 남아 당시는 온산이 경작지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새끼미와 국동 등 남쪽이 현재 아파트가 들어선 위치 이하였던 것은 토질의 척박함 때문이었다.

심박골 조림 편백

새롭게 태어난 구봉산의 나무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구봉산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수종들도 다양하게 바뀌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좀 더 큰 그림으로 구봉산다운 미래의 숲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구봉산에 맞는 수종을 채워 체계적인 숲가꾸기가 이뤄졌으면 한다. 

그보다도 우리는 나무를 욕심만을 채우는 소모의 대상으로 여겨 정성으로 대하지 못한 실수로 받았던 지난 교훈을 통해 나무는 인간의 생명동반자인 자연물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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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범 2017-07-11 11:14:55
글을 쓴다는것은, 화려한 미사여구의 나열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 전해내려오는
역사의 고증과함께, 체험을 바탕으로한 오랜,연륜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나무와숲은 우리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 불가결한 상생의 조화 라고생각한다.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과 여유,그것은 산과,나무와,숲이 잘 조화되어,우리들 모두를
자연으로 돌아가게하고,또한 자연과함께 호흡하며,살고있다고 생각한다.
김배선의 여수구봉산 이야기는, 지역사회에만 국한된 스토리가 아니고,전국적으로
퍼져나가,아름다운 메아리로 되돌아올것을 소망한다.
-하늘빛-
이명범 2017-07-11 10: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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