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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란 용어는 정당한가 ?

여순항쟁, 그 역사 바로 알기(1)

  • 입력 2017.08.07 22:07
  • 수정 2017.09.23 05:57
  • 기자명 주철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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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주철희 박사의 말 - 

<여순항쟁, 그 역사 바로 알기>를 연재한다. 이제껏 ‘여순사건’이라고 사용한 용어를 이 글에서는 ‘여순항쟁’이라고 사용한다. 이를 위해서는 ‘항쟁’, ‘사건’, ‘반란’으로 각각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가장 우선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판단의 몫은 잠깐 동안 독자(네티즌)에게 넘기겠다. 독자께서 스스로 판단해보기 바란다. 이 글을 연재하고 있을 어느 시기에 자연스럽게 설명될 책이 세상에 선보일 것이다.

역사를 논하는 데 있어 용어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명칭은 더욱 그러하다. 명칭 속에는 그 사건의 성격까지 내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역사연구자가 신중해야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여순항쟁, 그 역사 바로알기>의 첫 번째 글은 두 가지 용어에 대해 살펴보겠다.                                        

무의식 속에 쓰는 용어는 생각보다 큰 음모가 내포되어 있다.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은 생각보다 사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첫째, ‘부역자 심사’ 또는 ‘부역자 색출’에서 ‘부역자’란 용어이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밤늦은 시간에 발발하여 10월 27일 여수가 토벌군에 점령되면서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가 더 문제였다. 혐의자를 색출이다. 여수지역을 탈환한 토벌군은 서국민학교에 본부를 설치하고 여수읍 사람들을 집결시켰다. 일명 ‘부역자 심사’였다.

<그림-1>은 여순항쟁 당시 서국민학교의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이다. 제목이 ’부역자 심사와 서초등학교‘이다. 또한, 아래 인용문처럼 대부분 글에서도 ‘부역자’란 용어로 사용하였다.

< 그림  -1  >

국군은 반란군으로부터 여수․순천지역을 되찾으면서 공산 반란군 점령 하에서 누가 부역을 했는지 가려내기 위해 주민들을 국민학교 교정에 전부 모이게 했다. 색출 방법은 줄줄이 앉혀 놓고 눈을 감도록 하고는 공산반란군의 마수에서 벗어난 인사들로 하여금 줄 사이로 지나가며 부역자를 손가락 끝으로 지적하게 했다는 것이다.

혐의자를 색출하는 방법이다. 혐의자를 ‘부역자’로 표기하였다. ‘부역자 심사’ 또는 ‘부역자 색출’이란 표현은 적절한 것일까? 부역자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가담하거나 편드는 사람”이다. ‘반역’이란 용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엄청난 행위라는 것을 모두 알 것이다. 즉, 부역자란 용어를 쓴다는 것은 여순항쟁을 반역의 행위라는 것을 전제한 경우가 된다.

일반적인 쉽게 부역자 색출이란 표현을 쓴다. ‘부역자’란 표현 뒤에는 국가의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었다. 군과 경찰의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민간인 희생에는 무고한 민간인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한 책임은 국가에 있다. 책임 회피를 위해서는 불가피했다는 국군의 정당성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의도를 담고자 정부와 국군은 ‘부역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1948년 당시 '색출' 광경. 누구를? '부역자'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혐의자 아닐까.

‘부역자’란 표현은 여순항쟁, 제주4․3항쟁, 6․25전쟁 등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해 망라하여 사용되고 있다. 정부의 검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사용한 용어이다. 이제부터라도 ‘부역자’란 용어를 ‘혐의자’ 또는 ‘협력자’로 표현했으면 한다.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이 반역과 관련되었다는 근거는 없지 않는가.

두 번째 생각할 단어는 ‘진압작전’과 ‘토벌작전’이란 용어이다. 진압작전과 토벌작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독자(네티즌)도 한 번쯤 차이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림-1> ‘부역자 심사와 서초등학교’의 안내판 일부를 옮겨보겠다.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되자진압군과 경찰은 10월 27일부터 시민들을 가까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강제집결지로는 서초등학교 이외에도 동정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현재 중앙초등학교), 진남관 및 미평과 국동의 넓은 공지로 모이게 하였다.

위 인용문처럼 ‘진압’과 ‘진압군’이란 용어의 의미이다. ‘진압’이란 단어는 강압적인 힘으로 진정시키는 행동이다. 반면 ‘토벌’은 무력으로 쳐 없앤다는 뜻이다. 무력이란 살상 무기를 동원한 군의 행동이다.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을 비교하여 설명하면 이렇다.

제주4・3항쟁이 발발하고 미군정은 4월 5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사령관에 김정호 경무부(현, 경찰청) 공안국장을 선임하였다. 즉, 치안 문제로 접근하여 경찰이 주도하였다. 제주4・3항쟁의 경우 초반에는 진압작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한 용어이다. 이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제5여단 김상겸 대령)이 설치되면서 경찰 주도의 진압작전이 군 주도의 토벌작전으로 전환되었다.

반면 여순항쟁은 처음부터 군인이 주도한 토벌작전이었다. 10월 21일 정부에서 정한 부대 명칭도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대령)’였다. 10월 24일부터 시작된 여수 탈환은 대한민국 국군 사상 최초로 육.해.공군의 합동토벌작전이었다. 스스로 ‘토벌군’ 또는 ‘토벌대’라고 하였다.

여순항쟁 당시 군의 작전은 토벌작전이었으며, 주체는 토벌군이었다. 대체로 여순항쟁 때 군의 작전을 진압작전으로 표기한다. 물론 필자도 그랬다. 이는 토벌작전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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