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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이야기

귀농일기 (23)

  • 입력 2017.09.07 21:11
  • 수정 2017.09.07 21:12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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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민웅기

모 화백도 수염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 있다. 그의 수염철학이 딱히 심오하다거나 수염에 대한 취향이 대단히 독특한 것은 아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다름 아닌 '깃털론' 같은 것이다.

서양 속담에도 "깃털이 같은 새들이 어울린다."고 한다. 우리말엔 "유유상종" 도 있다. 하여간 각설하고, 이 친군 머리 긴 사람끼리  모여 보자고 열을 낸다. 그런데 꽁지 머리만 갖곤 충분치 않다고 꼬리를 단다. 수염까지 길어야 자신의 '깃털론'을 구족한단다.

그러기엔 내가 적격이구먼, 하고 속으로 곱씹어 본다. 그넘의 '깃털론'이란 경박하기 짝이 없고만, 꽁지머리에다 구렛나루 쯤 길면 눈에 띄겠지, 한 도사 아님, 한 예술인, 혹은 한 경지 하는 기인 쯤으로 여겨줄지도 몰라.

년전에 어떤 자리에서 어느 신사가 그러더라, 꽁지머리들, 자기도 몇 넘 아는데 다 별 볼 일 없다나 뭐라나. 세상의 꽁지머리들이 한가지로 별 볼 일 없다는 식의 그따위 썰이야 듣다 말면 그만이겠지만,
그런 식의 반응도 사고방식의 일면을 띄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넘에 신사 야그도 막 털어버릴 정도로 무가치한 소리만은 아닐 터다.
하여간 처음 나를 대면한 사람들이 내 첫인상을 어떻게 받는지는 잘 알 길도, 관심도 별로 없지만, 모 화가의 깃털론의 요건에 대해서만큼은 난 갖출 만큼 다 갖추고 있는 것으로 치부해도 된다.

꽁지머리에 코밑 수염에 턱수염까지 삼박자를 갖췄으니 말이다. 이런 내 겉 모습을 보고 왈가왈부 가타부타 하지 않는 것도 재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세상인심이라, 우리 딸 담이가 꼭 참았던 속엣말을 해왔다.

아빤 세상에서 누구 말을 잘 들어요? 제발 그 턱밑수염 좀 깎으면 안 되요? 제발! 하고 이제 통사정을 한다. 결정적으로 늙어 보인다는 지점에 이르러선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정도엔 항상 말 대비가 돼 있지 않을 리 없는 내가 다짜고짜  반격을 개시했다.

여인들은 왜 그렇게 남자들의 깃털을 통제하려 드는 지 모르겠네, 남자들 머리  긴 꼴을 못 보고, 짧게짧게, 단정하고 깔끔하게를 시도 때도 없이 강요한단 말야,

힘이 장사여서 천하무적이었던 삼손이 왜 그토록 무력하게 한방에 적의 손에 나가 떨어졌는 지 아니? 그건 머리를 깎였기 때문이야, 군대 가면 군인들이 왜  군율과 질서에 거의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충성하게 되는 지 아니?

머리를 빡빡 밀었기 때문이지, 자고이래 머리털을 통제하지 않으면 그 속의 정신머리를 지배할 수가 없거덩. 그러니까 그토록 독재자들이 집요하게 머리털을 짧게 통제하고 장악하려드는 거라고, 일본놈들이 식민통치를 하면서 우리 국민들을 단발시키고 학생들을 삭발시켰던 것도 다 그런 교묘한 꼼수가 배면에 자리하고 있었던 거라고,

머리 길고 수염 길면 건전한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고, 고작해야 시절을 핑계대고 산속에 쳐박혀서 도사짓이나 해먹던지, 아님 인간관계 단절하고 깃털들끼리 몰려다니며 무책임한 현실도피에 허송세월만 하고 말 것이 뻔하지 않냐고.

일단 이삼일 간격으로 면도날을 부드럽기 짝이 없는 살결에 대야 하는 불편함이 없어서 좋고, 머리 감는 수고로움만 적당히 감수할 수 있다면 연중 행사로 한 번 쯤만 가도 되니 미용실 비용이 절감되어 경제적이어서 좋고,
그뿐이랴, 무료한 틈엔 옛적 선비들이 그랬 듯이 수염 한번 쓸어내리는 재미도 쏠쏠하더니, 딸이라도 못말리는 깃털 행각이 돼 버렸을 것이다.

깃털론에 치명적인 논리적 공박이 또 있다. 꽁지머리 집단에 대한 곱잖은 시선의 저변에 자리 잡은 사회적 '불온함'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다. 사회적 불건전성이나 반항심과 같은  불온의 색깔을 덧씌워서 그 통제의 올가미를 조여 보겠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논조가 으례 그런 식이지 않겠는가.

최근에 그의 생활이 <한겨레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머리털이나 수염이 자라나는 대로 두었을 뿐이고 무위적인 방치를 했을 뿐, 멋을  가공할 조금의 의도도  있지 않다, 라고 항변을 거듭해 대지만, 문명론자들의 자연론자들에 대한 의혹과 반감은 그칠 줄 모른다. 혹여 개발과 문명을 부정하는 소지나  작은 기미에 대해서는  티끌만큼의 관용조차 허용치 못하는 저들 문명 패러다임의 곱잖은 시선은,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서 뿌리깊은 것이겠지만.

그러건 말건  개의치 않는 이 아침 나의 단상이 미치는  눈길은, 저 자연의 정원에서 뛰노는 새들과 나무들과 바람소리들에 가 있다. 누가 간섭하지 않아도 누가 나무라지 않아도  저들의 생기는 활달하고 저들의 자유스러움은 우주에 편만하다.

나무는 가지를 쳐 주지 않아도 제 웅자한 모습으로 한껏 드높고, 풀들은 꽃피우고 결실을 맺은 후에는 제 스스로 뿌리를 찾아 든다. 벌레들은 묵은 껍질을 벗고 겨우살이를 준비하고, 바람은 쌀쌀함을 더해 뭇 생명들에게 갈무리와 복귀의 명을 사무치게 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그 열매 또한 실하게 되어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짐도 자연스레 가붓하게 되어 가느니.

두발이건 수염이건 나고 자라고 사라져 감은 정한 이치에 따라 그 성쇠를 반복할 뿐이라,

아서라,
길고짧음도 얼마일러나, 내  몰라라 하여라.

한겨레신문에 필자가 소개된 기사 "마음을 내려놓고 비워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
 

편집자 소개글

‘무등산에서 온 편지’를 보낸 민웅기는 전 여수YMCA총무였다.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의했으며 현재 무등산 인문학당 강사다. 「태극권과 노자」저자이고, ‘무위태극선’,'송계선원' 대표이다. 송계선원은 노자와 장자,공자와 맹자,원효와 최수운의 삶과 지혜를 공부하고, 태극권과 명상 등을 수련하는 장이다. 또한 필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최근에는 장자 탈고를 마쳤다. 기존 번역서나 주석서와는 달리 장자 사상을 산책하듯이 풀어서 독자에게 알기 쉽게 필자만의 감상방식으로 저술했다. 본지에서는 ‘청춘일기’ 20회 연재에 이어 ‘귀농일기’가 진행중이다. 마무리 ‘수행일기’가 이어지며, 연재 이후에 필자는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필자 민웅기 연락처 : 전남 화순군 이서면 송계길39. 손전화 010-3621-9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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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이 2017-09-29 21:37:07
무등산에 계셨군요.기사로 다시 뵙게되어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