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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동포 학살을 거부 한다"

제주 4.3출동을 거부하면서 1948년에 그렇게 여순사건이...

  • 입력 2017.09.15 15:02
  • 수정 2017.09.23 05:53
  • 기자명 곽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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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 박사 현대사 강의 세 번째 강좌

14일 해안통 갤러리에서 현대사 3번째 강의를 하는 주철희 박사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항쟁으로 불리는 4.19, 5.18, 6.10 그리고 '촛불'에 의한 대통령 탄핵과 구속 그 이정표의 첫 머리에 1948 년 10월 19일 '여. 순 항쟁'이 있었다.”.

본지 가 매주 연재 하고 있는 전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 순 연구센터장을 역임한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의 '현대사 여, 순 항쟁 바로 알기' 세 번 째 마당은 “여수 제 14연대는 제주도 출동 명령을 왜(?) 거부 했는가 ?" 라는 질문과 답으로 진행됐다.

주철희 박사에 의하면 이날 1948년 10월 여수 주둔 14연대 일부 군인들은 제주 도민을 학살 하라는 명령에 항명 하면서 저항군을 이루고,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를 꾸린다.

그들은 당시 10월 24일 호남 지역에서 최초로 발행한 지역 신문 '여수일보' (현 진남관 아래 진남로 상가 통만두집)에서 그 제호를 '여수 인민보' 라는 이름으로 타블로이드판 한 장 짜리로 딱 한번 발행 하면서 자신들의 출병 거부의 당위성을 밝힌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이라는 제목으로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 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 한다"는 첫 말을 시작으로 14연대 저항군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를 출동 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 하는 것을 거부 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 히였다 " 

이어 그들의 거병의 뜻을 첫 번째 동족상잔 결사반대, 둘 째 미군 즉시 철퇴를 강력하게 밝혔다.

그렇다면 14연대 일부 저항군들이 이렇게 나 설 수 있는 배경은 뭐가 있었을 까? 주철희 박사는 먼저 당시 제헌 헌법을 예로 들었다.

제헌 헌법 제 6조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 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

이 내용으로 보면 그들은 법에 따른 법에 의한 자신들의 뜻을 명확하게 전하고 있는 샘이다.

또 당시 제주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주철희 박사에 따르면 1948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민중들을 다 학살해도 좋다는 소위 초토화 작전 명령을 내렸다.

이 초토화 작전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을 토벌하라는 일제의 작전명과 같다. 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당시 국내 정세를 미군정은 소련과 끊임없이 대립 각을 이루면서 세계 패권 장악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자신들의 동북아 압박과 소련을 견제 할 수 있는 전초 기지를 제주에 두고자 했다.

그러기에 민군정과 단정과, 단선에 반대하고 군, 경의 폭압에 맞선 제주도민들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승만 또한 집권 과정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던 시점 이었다.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친일파는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은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친일파를 처단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이 같은 복잡한 국내. 외 정세 속에서 제주와 여수 순천은 권력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자들의 희생양이 된 샘이다.

그러면 14연대는 당시 제주의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었을까 ?

친일 매국노들이 미군정에 빌붙어 민족적 양심을 가진 인사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무법천지의 공포 속에서도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헌신 분투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제주 4.3 현장에서의 김익렬이다.

그는 4.3 당시의 현지 연대장으로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서 민중봉기를 주도하고 있던 김달삼과 직접 만나 담판 하는 등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백방으로 노력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무차별 대량학살의 초토화 작전만은 막아야한다는 일념으로 미군정과 경찰에 맞서 고군분투 처절히 주장했다.

바로 그가 제주 9연대 연대장에서 14 연대 연대장으로 부임 했다.

제주의 상황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1948년 8월 총 4회에 걸쳐 국제 신문에 당시 제주의 상황을 전하는 기고문을 연재 했다.

즉 제주 출병을 반대 하면서 동족상잔의 반대와 미군즉시 철수를 강령으로 세웠던 14연대 저항군들은 제주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 하고 있었던 김익렬 연대장으로 영향력이 어느 정도 미치지는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주박사는 던지고 있다.

한편 주철희 박사의 현대사 여, 순 항쟁 바로 알기 네 번째 강좌는 오는 21일(목) 오후 7시 여수 해안통 갤러리 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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