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에비야" 슬픈 연원따라 찾아간 대마도 귀무덤

한국민족종교협의회원들의 대마도 연수

  • 입력 2017.09.18 15:09
  • 기자명 오문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마도 연수에 나선 한국민족종교협의회원들이 귀무덤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절하고 있다.
▲  대마도 연수에 나선 한국민족종교협의회원들이 귀무덤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절하고 있다.
ⓒ 오문수

 


(사)한국민족종교협의회원이 참가한 대마도 합동 연수가 부산과 대마도일대에서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한 '민족종교 정신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열린 연수(13일~15일)에는 12개 교단 소속회원 80명이 참여했다. 회원들이 참가한 시민민족문화강좌는 역사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참여자들을 역사문화 지도자로 양성하기 위함이다.

서울과 대전 등 전국각지에서 모인 회원들이 주간 일정을 마치고 여장을 푼 곳은 아르피나 유스호스텔.  개회식(저녁 7시)에 이어진 차례는 김문길 교수의 '일본에 있는 한국인 귀·코·머리 무덤실태' 강의다. 

 부산 아르피나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한국민족종교협의회 개회식 모습
▲  부산 아르피나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한국민족종교협의회 개회식 모습
ⓒ 오문수

 


부산외국어대학 명예교수인 김문길 교수는 일본 국립교토대학과 고베대학원에서 한일관계사를 전공했다. 20여 년간 일본에서 독도를 연구했고 일본인이 제작한 고지도와 고문서를 발견·연구해 일본인들에게 "독도는 조선 땅"이라고 강연하고 있다. 공로를 인정한 보훈청에서는 그를 독도를 강연하는 국가 교수로 임명하기도 했다.

일본각지에 묻힌 귀·코·머리 무덤을 연구 발표해 '코 박사'가 된 김문길 교수
 

 귀무덤 앞에서 위령제를 마치고 기념촬영에 나선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이찬구 사무총장(왼쪽)과 김문길 교수. 뒷편에 귀무덤이 보인다.
▲  귀무덤 앞에서 위령제를 마치고 기념촬영에 나선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이찬구 사무총장(왼쪽)과 김문길 교수. 뒷편에 귀무덤이 보인다.
ⓒ 오문수

 

 

 한국인들의 위령제를 허락한 대마도 귀무덤의  땅주인과 함께 기념 촬영했다. 왼쪽부터 부산종교인평화회의 박차귀 공동회장, 대마도 땅 주인, 김문길 교수
▲  한국인들의 위령제를 허락한 대마도 귀무덤의 땅주인과 함께 기념 촬영했다. 왼쪽부터 부산종교인평화회의 박차귀 공동회장, 대마도 땅 주인, 김문길 교수
ⓒ 오문수

 


김문길 교수는 교토대학 시절 귀 무덤 가까이 살았다. 자연스레 귀·코무덤에 대해 조사 연구한 후 논문을 발표하자 각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 후 일인들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 코 박사다.

그는 임진·정유의 왜란 시절 왜장들이 조선인의 귀와 코, 장군과 의병장들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베어 전리품으로 삼고 무덤을 만든 것에 분개했다. 또다시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며 전국을 돌며 숨은 역사를 알리고 있다. 

그가 발견한 오카야마현 비전시 가가토 구마야마 산기슭에 있는 로쿠스케 코 무덤은 1992년 대한불교 자비사 주지 박삼중 스님과 한일불교협회가 주선해 전주 호벌치에 안장했다.

대마도 조선인 귀무덤... 부산출신 8500명 귀 잘려 대마도에 묻혀
 

 조선인들의 귀를 절이는 모습. 임진, 정유의 두 왜란 중 도요토미는 조선인들의 귀, 코, 머리를 잘라 바치라고 명령했다. 김문길 교수 설명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라고 한다
▲  조선인들의 귀를 절이는 모습. 임진, 정유의 두 왜란 중 도요토미는 조선인들의 귀, 코, 머리를 잘라 바치라고 명령했다. 김문길 교수 설명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라고 한다
ⓒ 김문길

 


김문길 교수가 대마도에 있는 귀 무덤을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2014년 8월 대마도에서 도난당한 불상을 연구하기 위해 '서산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 봉안위원회'와 3일 동안 대마도 현장조사 중 발견했다.

임진왜란 당시 1진으로 부산에 상륙한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와 처남 남매간이다. 초기엔 출병을 꺼렸지만, 부산지리에 밝다는 이유로 선봉에 서 조선땅을 유린했다.

두 번의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당시 전리품으로 귀를 잘라 오라고 했다. 사람의 귀는 두 개다. 임진왜란 당시 두 개의 귀를 두 사람으로 계산해 전공을 쌓는다는 걸 안 도요토미는 정유재란시에는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명령했다.

김 교수가 발견한 문서에는 코를 잘라 바쳤다는 코 영수증도 있다. 임진·정유의 두 전쟁당시 귀와 코가 잘린 사실을 기록한 오카와우치 히데모토의 <조선물어(朝鮮物語)>의 기록내용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코 영수증. "코를 9상자에 넣어 히데요시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코 영수증. "코를 9상자에 넣어 히데요시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김문길

 


"조선인 18만5738명, 중국 명나라군 2914명 총합계 21만4752명이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군에서는 머릿수 879명의 조선인 코를 베었다."

교토에 있는 귀 무덤은 간판을 걸고 관리가 되어있지만, 대마도 무덤은 귀 무덤인지 코 무덤인지에 대한 문헌 자료가 없어 귀 무덤으로만 알려져 있다. 김문길 교수는 "대마도에서 발견된 귀 무덤은 소 요시토시의 전리품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에비야!" 연원은 코와 귀를 잘라간 일인들
 

 위령제를 마친 일행이 귀무덤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  위령제를 마친 일행이 귀무덤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호남이 고향인 필자는 어릴 적에 어른들로부터 "에비, 에비야!"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자랐다. 필자가 뜨거운 불이나 물 옆에 간다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 물건을 만지려고 할 때 들었던 소리다. 그래서인지 내 어릴적 가장 무서운 존재는 "에비야!"이다.

에비는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耳), 코(鼻), 사람(爺)이 합쳐진 말로 귀나 코를 베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유재란 때 종군한 승려 게이넨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도 나오는 내용이며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 순사를 에비라 불렀다고 한다.

전혀 관리되어 있지 않은 지름 1.5m의 돌무덤... 한국으로 이장하든지 아니면 비석이라도 세워야 

13일 오전 9시 반, 연수단 일행이 부산항을 출발해 대마도 히타카스항에 도착해 관광버스로 30분쯤 거리에 있는 가미시마 가와우치에 있는 조선인 귀 무덤을 방문하는 날 하늘은 청명했다.

김 교수의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수년 동안 대마도를 안내한 가이드도 처음으로 알았고 방문도 처음이라도 한다. 밭두렁 사이 풀숲에 지름 1.5m 정도의 돌무더기만 보였기 때문이다. 50여㎝ 정도의 돌부터 주먹 크기의 돌들 사이로 풀들이 삐죽이 솟아나와 있었다.

400년간 이국땅에 묻혔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고픈 원혼들일까? 김 교수로부터 발견하게 된 자세한 전말을 들은 일행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제수용품을 놓고 머리 숙여 절하며 위령제를 지냈다. 김 교수가 말을 꺼냈다.
 

 위령제를 마친 후 부산종교인평화회의 박차귀 공동대표가 귀무덤에 술을 따르고 있다.
▲  위령제를 마친 후 부산종교인평화회의 박차귀 공동대표가 귀무덤에 술을 따르고 있다.
ⓒ 오문수

 


"이 무덤을 처음 발견했을 때 저는 울었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이렇게 방치하지 말고 비석이라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귀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던 일행 중 한 분의 얘기가 내 가슴을 짓누른다. "한 마디로 가슴 아프죠 뭐!"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방치된 귀 무덤을 한국으로 봉안하던지 조그만 비석이라도 세워 혼령들을 위로해야 한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