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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밤 여수 총소리는 민중의 분노였다

주철희 박사 여·순 항쟁 바로알기 제4강 ‘봉기와 항쟁’

  • 입력 2017.09.22 15:54
  • 수정 2017.09.23 05:51
  • 기자명 곽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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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 박사 '여순항쟁' 바로알기 4강
전남동부 주민이 군인들 봉기에 동조한 이유는?
14연대 군인 "동족학살 제주출동 반대"
국방경비대는 경찰에 수모 자주 당해
경찰은 친일 경찰이 권력 독차지하고 득세
14연대 군인 9명 휴가차 구례서 경찰에 구타당해
14연대 사병들 경찰에 적대감 있어
군인 봉기때 '구례경찰'이 14연대의 타겟
농민들 삶 어려워, 대부분 소작인데도 착취당해
거기다 1948년 전남동부 농토는 수해 피해 극심
부폐 관리들은 쌀 수천가마씩 착복
농민이 다수인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관심
관리와 경찰에 시달린 지역민... 봉기 군인에 자연스럽게 동조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본지가 매주 연재하고 있는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의 현대사 강좌‘여순 항쟁 바로알기’가 어느 덧 네 번째를 맞았다. 네 번째 강좌에서는 "전남 동부 주민은 왜 제주 출병을 거부한 봉기군에 동조하고 지지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왔다.

주 박사는 당시 제14연대 군인이 제주도 출동은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초토화 작전의 일환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이를 인지한 일부 병사들은 군인의 사명에 맞지 않은 부당하고 잘못된 명령이라면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면서 일어났다고 설명 한바 있다. (관련기사 : "우리는 같은 동포 학살을 거부 한다")

군인들의 봉기를 전남 동부 주민이 지지한 데는 배경이 있다. 당시 군과 경찰의 미묘한 갈등이 그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 1945년 해방 이후 마땅히 청산됐어야 할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오히려 더 큰 권력과 부를 얻고 한반도 이남을 유린했다.

21일 해안통갤러리에서 주철희 박사의 여·순 항쟁 바로알기 제4강 ‘봉기와 항쟁’이 강의 중이다.

권력과 치안을 장악한 친일파 경찰이 문제였던 것이다.
주철희 박사는 그 예를 먼저 1947년 6월에 일어난 '영암사건' 들었다. 당시 ʻ국방경비대ʼ는 경찰의 예비 병력이므로 ʻ경찰예비대ʼ 혹은 ʻ경찰보조기관ʼ 성격이 강해서 경찰에게 무시를 당해 왔다.

이 시기에 광주 제4연대 소속 군인이 외박을 나왔다가 영암군 신북 지서 앞에서 영암 경찰관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6명이 사망했지만 당시 경찰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일이 바로 '영암사건'이다. 

그 사건 외에도 1948년 9월 25일 휴가를 나온 제14연대 군인 9명이 구례에서 그곳 경찰들에게 집단 구타를 또 당한다.  상부에 조처를 요구했지만, 군인의 요구는 묵살됐다.

순천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순천, 구례, 영암 세 지역에서 일어난 군경충돌 사건을 통해 제14연대 사병들은 경찰과 무력충돌을 경험 했고,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갈등양상으로 인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경찰이 쳐들어온다”는 외침은 병사들의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구례경찰서를 목적지로 그들을 응징하자는 결기로 응집되었으며, 그 뜻에 동조 한 군인들이 대다수였다는 것이 주 박사의 견해다.

그렇다면 군인의 봉기가 왜 '항쟁'으로 번졌을까? 주 박사는 당시의 민중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방 후 남한의 경제는 줄곧 위기인 상황에서 민중들의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던 이승만 정권은 민중의 생활고를 덜어 내 주는데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또하나 당시 남한은 전 국민 77% 이상이 농사에 종사 하고 있을 만큼 핵심 산업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소위 지주들의 소유였고, 전체 농가 호수에서 소작 비율은 1913년 35%에서 1941년에는 54%까지 급증 했다. 해방당시에는 전 농민의 80% 이상이 순 소작농과 유사한 위치로 전락했다.

게다가 미군정의 미곡 수집 정책은 소작농이나 빈농에게 매우 불리했다. 미곡수집 실적을 올리기 위해 경찰과 관리의 폭압은 일제시절 보다 더 가혹해졌고 이들의 부정부패는 일제 강점기를 능가해 농민들에게는 서러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1948년 6월부터 9월 까지 세 차례 걸쳐 일어난 태풍과 긴 장마는 농사에 의지 하고 살아가고 있던 전남 동부 지역의 민중들에게 삶의 의욕마저도 잃게 했다. 여수의 경우 1948년 7월 폭풍으로 많은 벼 가마가 유실되어 식량영단은 배급 식량을 분배 하지 못 했다. 정미업자가 이윤이 박하다는 이유였다. 태풍과 장마로 인해 더 어려워진 상황에서 7월 하순부터 8월 상순까지 2기분 배분을 주지 못해 민중의 배고픔은 극에 달해 있었다.

민생고에 시달린 농민들과 도시의 궁핍한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환경에 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 천가마니씩 착복하는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면서 그들을 비호한 관리와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좌. 우익 이라는 편 가르기 이념을 떠나 먹고 살기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에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시대상이었다는 게 주철희 박사의 설명이다.

바로 이 시기 제 제14연대 군인의 봉기는 자연재해로 인한 삶의 막막함과 함께 관리와 경찰의 부패에 참다못한 지역민의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들의 봉기에 자연스럽게 동조하고 나 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철희 박사는 그렇게 전남 동부 지역민이 봉기군과 함께 역사에 소용돌이 나 설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하면서 봉기에서 항쟁으로 전환된 상황을 설명했다.

소설 태백산맥의 한 장면 김범우 집에서 소작을 짓고 있던 문 서방이라는 사람이 김범우에게 던진 말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그 곳에 1948년 10월 19일 여순항쟁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의 현대사 여순항쟁 바로 알기 강좌는 오는 28일(목) 오후 7시 여수 해안통갤러리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강좌를 끝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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