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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1948년 10월 여수는?

'여순항쟁' 69주년을 맞으며

  • 입력 2017.10.19 10:33
  • 기자명 한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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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 박사는 여수에 살면서 여순사건을 연구하는 학자다. 여순 현대사를 연구한 저서 2권을 펴냈다.

엊 그제 펴낸  두번째 저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에는 김형도 목사가 기록한 여순사건 당시 여수의 상황이 일자별로 나와 있다. 귀한 자료다.

기독학생회 지도자였던 김형도 목사는 세계 기독교 학생 지도자 대회(개최 도시 세이론)에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1948년 10월 17일 여수에 왔다. 제14연대에 군납 사업을 하는 처의 친척 송운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 목사는 이 때 여순사건을 목격하고,  '기독교 가정' 창간호에 200자 원고지 52매 정도의 글을 썼다. 일자별로 목격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우연하게 여수에 와서 본 것을 쓴 귀한 글을 주철희 박사가 찾아 정리를 하였다.

여순사건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

여순사건을 오랫동안 조사하고 연구해온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전체 피학살자 수를 10,000 여 명으로 추정하였다. 이중에 95%가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고, 5%가 반란군과 지방 좌익에 등의 좌익세력에게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희생자 수를 추정하는 데는 시점이 중요하다. 당시 전라남도청과 정부가 조사한 것은 1949년 11월 11일까지가 조사 시점이었다. 제주 4.3사건은 한라산 통제를 해제하고, 한라산 마지막 무장대 토벌을 끝낸 1957년 4월 2일을 기준으로 희생자를 조사하였다.

여순사건은 언제까지 진행되었다고 봐야 하는가?

여순사건 여파로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백아산, 모후산 등에서 빨치산이 활동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여순사건은 빨치산이 지리산 입산 금지를 해제하고, 공식적으로 빨치산의 섬멸을 선언한 1955년 4월 1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 주철희 박사의 주장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여순사건 때 희생자를 비롯하여 한국전쟁 전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형무소 재소자의 피해를 포함해야 한다. 이를 종합하면 1949년 11월 11일 전라남도 당국이 발표한 11,131명, 보도연맹사건의 피해자 3,400명, 형무소 재소자 1,000명을 포함하면 최소한 15,000 여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주철희 박사를 오늘 만날 수 있다.10월 19일 여순사건 69주년을 맞이하여 저자의 여수관련 두 번 째의 저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출판 기념 토크콘서트를 저녁 7시 여수시 신월동 동성자동차학원 2층 강당에서 개최한다. 14연대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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