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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다크 투어리즘', 역사 교훈 여행(Dark History Tour)

여순사건 사적지에 대한 '다크 투어'를 돌아보며

  • 입력 2017.12.29 15:06
  • 수정 2018.01.21 14:15
  • 기자명 정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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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소설가 정숙인은 여수출신이다. 여수여고를 나와 전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 <백팩>은 여순사건의 상흔을 다뤄 문단의 관심을 받았다.  시 낭송가이기도 한 그는 전북지역에서 연극인으로도 활동해 왔다. 
그가 천착하는 문학의 주제는 고향 여수의 아픈 역사 ‘여순사건’이다. 본지가 관심을 갖고 주철희 박사와 함께 진행한 여순사건 바로알기 강좌에 그는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열차를 타고 달려와 5강까지 시민들과 함께 들었다. 여순사건 7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그는 또 문인들과 함께 여수역사 여행을 마치고 여행기를 남겼다. 소설가 정숙인의 여행기를 특별 기고로 싣는다. 
아울러, 여순사건 70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여순사건 진원지였던 14연대 앞에서 투어에 참여한 여수작가회원과 시민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정숙인

7월 29일, (사)한국작가회의 여수지부에서는 여순사건 사적지에 대한 다크 투어를 주최했다. 여순사건 진원지 등 비극적인 현장 10여 곳을 이정훈 지리학자와 함께 돌아보는 것이다. 다크 투어의 첫 장소는 1948년 국군 14연대가 주둔했던 여순사건 발발지에서 시작되었다.

과거 14연대였던 자리에 이제는 안개 탓에 희미하게 보이는 굴뚝 하나가 서있다     ⓒ정숙인

 

여수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여순사건의 흔적

14연대의 흔적은 지금의 여수 신월동에 위치한 한국화약 여수공장 부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회색의 굴뚝 하나가 투어에 참여한 시민들을 내려다 봤다. 공장 측에서는 회사의 로고나 정문을 배경으로 사진이 찍히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투어에 참여한 시민들은 멀리 높게 솟아 14연대의 지표를 알려주는 낡은 굴뚝이 고마울 뿐이었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고개를 길게 빼고, 그것을 마주 바라보았다. 회색 굴뚝이 있던 곳은 과거 연병장으로 사용됐다고 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1948년 10월 17일 20시에, 신항에서 승선해서 제주도로 가라는 육군의 명령’에 항명(抗命)했을, 연병장의 병사들을 떠올렸다. 

굴뚝에서 이백여 미터 떨어져 마주 보이는 수풀에는 군수물자를 비축하거나 유사시 방공호로 쓰였을 여러 개의 동굴이 있었다. 처음 일본항공부대가 자리 잡았고, 미군정대가 그 현장을 그대로 이용했고, 국군 경비대는 14연대로 다시 자리 잡았다.

14연대 앞 벙커   ⓒ정숙인

일본군은 경제적 수탈을 위한 군사적인 요충지로 여수를 인식했다. 일본이 경제적 수탈을 하는 과정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통로는 바다였다. 일본군 해군항공부대는 이곳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이동시켰다. 

투어를 하는 회원들은 썰물일 때만 드러나는 400여 미터의 수상비행기 이착륙 터를 보고 강점기 일본군의 치밀함에 놀라 한참이나 그 자리에 붙들려 있었다. 오키나와, 제주도, 거문도, 여수까지 연결된 경로는 그들에게 방어노선이었다. 

썰물에만 드러나는 옛 수상비행기 이착륙 터  ⓒ정숙인
참가자들이 수상비행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숙인 

이정훈 지리학자는 왜 여순사건이 여수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14연대의 봉기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것처럼 14연대와 여수, 순천 시민이 빨갱이여서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역사적인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숨어있던 일제강점기의 순사들은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경찰 신분으로 복귀되었다. 당시 불안정한 이승만 정권은 빠른 시간 내에 남한에서 자리 잡기 위해 치안과 질서 유지가 필요했다. 

해방직후 정통성이 결여된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일제 강점기의 치부를 해결하지 못한 채 미군에 의존했다. 국민의 삶은 더 피폐해졌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국민은 정부에게 보호받지 못했다. 

여수에서 14연대가 창설되자 시내 거리에서는 모병이 있었다. 젊은이들에게는 모병을 위한 병사의 제복이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또 14연대 병사가 되는 것은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중에는 이승만 정권의 경찰조직이 못마땅한 민간인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14연대에 자원입대했다.

시민과 작가회의 회원들이 벙커 안을 살펴보고 있다    ⓒ정숙인

 

여순사건, '반란'이 아니라 정부의 무력진압에 대한 '항명(抗命)'

여순사건(여수 순천 십일구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48년 10월 17일 20시에, 신항에서 승선해서 제주도로 가라는 육군의 명령이 우편으로 하달된다. 그러나 14연대 군인들은 항명(抗命)했다. 14연대 군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제주 시민을 향해, 같은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 없다는 그것. 제주4·3항쟁에 대한 정부의 무력진압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지리산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찬탈하겠다는 목표 따위는 없었다. 반란(叛亂)이 아니라 항명(抗命)사건인 것. 

10월 19일 봉기군에 의해 발생한 이 사건은 장교와 하사관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다음날 20일 아침 8시까지 시내를 장악해 여수 역에서 통근열차를 타고 순천까지 진입하게 된 것이다. 

봉기를 처음 계획한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승만 정부와 국민들이 바라는 정부 사이에서 학생들마저도 봉기군의 생각에 많은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일제 강점기에 이어 다시 억압받고 핍박받는 것에 대해 잘못을 바로잡고자 했다. 당시 봉기군뿐만 아니라 학생이나 시민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에 더 집중했고, 그것이 곧 민심이었다. 

민예총 소속의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있었다. 시민과 학생이 군인들과 뜻을 함께하면서 ‘여순항쟁’으로 일파만파 커진 것이었다. 군인들이 봉기한 사건이지만 학생, 시민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즉 봉기군의 활동이 그만큼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10월 20일, 여수에서는 인민대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모인 시민은 천여 명 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앙동의 인민재판장소인 인민 대회장소는 진남관 아래 진남상가 입구였다. 이승만정권의 토지계획을 시정하라든가 경찰들의 잘못된 것을 성토하고, 식량배급이나 토지배급을 논의했던 장소이다.

과거에는 봉기의 주체에 주목해 여순 항쟁을 반란(叛亂)사건이라고 했다. 이승만 정권은 14연대 군인들 중에 사회주의자가 많다고 주장했고 그들을 청산하려 했다. 정치적인 것과 얽혀 여순사건이 발발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정훈 지리학자의 말이었다. 

군인이라고 해서, 잘못된 명령에 대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잘못된 명령이라면, 그것이 국민의 정서와 국민의 안전이나 안녕을 위해(危害)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재고하고 고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정훈 지리학자는 진지하게 따져볼 일이라고 했다.

여순사건의 진원지인 14연대 주둔지 다음 장소는 국군과 봉기군의 첫 교전지였던 연등동의 인구부전투지. 17번 국도로 이어진 여수의 둔덕동을 지나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는 왼쪽으로 굽어져 있었다. '인구부'는 왼구부(왼쪽으로 구부러진)의 다른 이름이다. 

미군의 지지를 얻던 이승만 정권 초기의 존립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이 사건을 서둘러 진압하려고 했다. 토벌대 국군 총사령관은 자신이 어떻게 진압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장갑차를 이끌고 종군기자를 대동했다. 

그러나 연등천을 감싸고 오는 길은 매복하기 좋은 길이었다. 장갑차를 멈추고 위로 모습을 드러낸 토벌대 사령관은 매복된 봉기군의 사격을 받게 되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나갔다고 한다. 결국 순천 쪽으로 퇴각하게 되었고, 오히려 망신만 당했다.

왼손을 구부려 인구부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정숙인

결국 학생, 시민, 봉기군들이 토벌대를 물리친 것이 과대평가 요인이 되면서 총11개 대대의 육군이 해상으로 진입했다. 

10월 24일, 봉기군이 광양 백운산 쪽으로 퇴각하자 남아있던 좌익계 인사도 밤을 타고 광양으로 피신했다. 여수에는 학생과 운동가 일부만 잔류했고 실제 남아있는 병력은 없었다. 봉기군과 주력부대가 빠져나간 여수는 무방비 상태였다. 

함포사격으로 여수는 불바다가 되었다. 도저히 토벌대와 대적할 수 없었다. 시민을 향해 함포사격을 했다면 문제가 있다. 신항 함포사격에 대해서는 연구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오동도 쪽으로 와서 해안 쪽에 위협사격을 하고, 시내 쪽에 실제 효력사격 했을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아직 시민들에게 낯선 ‘다크투어’ 역사여행

다크 투어 회원들은 가담자 색출지인 서교동의 서초등학교(옛 서국민학교)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역사의 현장으로 가는 골목길 어디쯤에서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 가담자 색출 후 국군 토벌대에게 학살당했을 시민의 아내, 그 여인의 등에 업혀있었을 어린 아이는 아니었을까. 

때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선 젊은 부부가 서초등학교 앞 상점 주인에게 다크 투어 회원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여수8경과 같은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솔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신기했던 것이다. 그들에겐 ‘다크 투어, 역사교훈여행’이 낯선 것이다. 

가담자 색출지인 서초등학교 앞에서 참가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정숙인

종화동의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는 여순사건 관련자 처형지였다.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되자 진압군과 경찰은 1948년 10월 27일부터 여수 시민들을 모아놓고, 중앙초등학교(옛 종산국민학교), 서초등학교(옛 서국민학교)에서 봉기군 가담자와 부역자들을 색출했다. 

그때 군인들은 점령군의 모습으로 시민을 대했다. 우익단체나 경찰들을 동원해서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게 하고 손가락으로 지목하게 했다. 그것은 ‘손가락총’이라 불렸다. 그렇게 지목당하면 학교 뒤로 끌려가 즉결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여수시내가 함포사격과 진압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지켜봐야 했다. 이틀을 학교 운동장에서 보낸 시민 중 일부는 즉결 처형됐으며, 부역 혐의자로 분류된 시민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돼 교도소로 보내지거나 학살당했다.

반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색출했던 기준은 운동화였다. 일본식 운동화를 신고 있던 사람을 반군으로 분류했다. 국방색 러닝, 팬티를 입고 있는 사람들도 반군으로 색출 당했다. ‘겉옷을 바꿔 입었어도, 너희들이 너무 급하니 속옷까지 갈아입지는 못했겠지!’한 것이다. 

소총은 기름때가 묻기 마련이었고 손톱 밑의 까만 때 낀 사람도 반군으로, 머리 짧게 깎은 학생들도 희생당했다. 토벌군은 반군으로 분류한 그들을 차에 싣고 학살터로 갔다. 우리는 오래전 그들처럼 경로를 따라 학살터로 이동했다.

참가자들이 옛 종산국민학교였던 중앙초등학교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정숙인

엑스포역이 보이는 신항 위 도로에서 오동도 너머 멀리 남해 쪽의 애기섬을 바라봤다. 남해군 상주면의 애기섬은 보도연맹 관련자 수장지였다. 1949년 6월 이후 가담자나 좌익성향 사람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고 그들은 특별관리대상이었다. 그 대상자들 120여명은 돌에 묶여 애기섬이라 불리는 남해 소취도, 무인도에서 수장 당했다. 

1950년 6·25직후 국군이 진격, 후퇴하는 과정에서 대상자들이 후방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이유였다. 보도연맹관련사건. 민간인들이 단지 좌익성향이라는 이유로 정식재판 절차 없이 수장당한 사건이다.

 

투어의 마침표를 찍은 마래터널, 일제 수탈의 증거

마래터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의 경제적 수탈을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징용해 만든 군사적 교통시설이다. 마래산을 통과하는 동쪽사면에 마래터널이 있고, 산의 남쪽사면에 석천사와 이순신의 넋을 기리는 충민사(사적 제381호)가 있다.(한국지명유래집 전라·제주편 지명) 
마래산은 해발 385m의 전라남도 여수시의 오림동과 덕충동 일대에 위치한 산이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성암인 중성화산 암류로 이루어졌으며, 여수반도 동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한려해상국립공원과 이어지며 해안절벽이 발달해 있다. 마래산은 마수청람(馬岫晴嵐;아지랑이 넘실대는 마래산)이라 하여 여수 팔경 중 제8경으로 꼽힌다.
(두산백과)

 

마래터널 앞에서 다크 투어 회원들은 모두 내렸다. 터널을 걷기로 한 것이다. 터널 앞에서 차량들은 빨간 불이 초록으로 바뀌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터널 입구 오른쪽 윗부분에 보이던 ‘오른쪽으로 비켜서시오.’라는 LED표지는 하얀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단편 소설 <백팩>을 쓰기 위해 걸었던 2년 전과는 교통 시스템이 달라져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밀린 차량들을 뒤로 하고 회원들은 침묵으로 줄을 이으며 터널로 입장했다. 대피소라고 이름붙인 널찍한 공간이 나왔을 때 비로소 오른쪽으로 비켜서서 마래터널의 진실을 바라보았다. 

다크 투어에 참여한 박성태 사진작가는 벽면을, 혼령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잠들지 못하는 것으로, 살점이 찢긴 형태로 느꼈다. 또 인간의 나약함과 야만성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 마래터널을 지나고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바로 샀다고 한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었을 이 터널에서의 죽음과, 잠들지 못한 혼령들과 대화하게 되는 상황이 힘들더라고요.” 박성태 작가는 지난 6월부터 마래터널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받은 느낌 그대로를 사진으로 전달할 생각이라고 했다.

마래터널을 걸어나오는 참가자들   ⓒ정숙인

중심을 잡기 위해 벽을 붙들었다. 생명을 느낄 수 없는 검은 벽은 서늘했다.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퍼지는 차가운 전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 검은 화석 속에 깃든 무언가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중략) 

누군가 시체들 속에서 아버지를 봤다고 했다. 하지만 제주여자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눈앞은 검고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사람들이 터널을 지나 구덩이 앞에서 자신들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사람들, 그 주검들을 보는 것은 참혹했을 것이다. 이제 자신들도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제주여자는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으로 아버지의 주검이 없는 걸 확인해야 했다. 제주여자에게 터널은 희망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군들은 경제적 수탈을 위해 한국인에게 이 터널의 건설을 부역시켰다. 한정 한 정씩 떨어져나간 고통의 흔적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터널을 뚫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차갑게 잊힌 검은 기억들이 터널의 천정에서 바닥까지 벽을 타고 내렸다. 통행하는 차량과 행인을 위해 설치된 불빛은 푸르스름했다. 그 때문인지 거대한 수용소처럼 음울했다. 

내가 상자를 받던 날, 외할머니는 내게 마래터널을 알려주었다. 외할머니가 나보다 더 어렸을 때, 만성리로 가는 이 길은 암흑천지였다. 사람들은 한낮에도 그믐밤처럼 벽을 붙들고 귀를 곤두세우며 걸을 뿐이었다. 오래전 그들은 이 벽을 더듬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산소처럼 들이마셨다. 차들의 전조등과 후미등은 점점 더 규칙적으로 패턴화 되었다. 어지러웠다.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다시 벽을 붙들어야 했다. 

아아. 누군가가 내 손끝을 쳤다. 벽, 벽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었다. 벽을 붙들 때마다 터널 부역자들의 터진 손이 만져졌다. 한손 한 손, 또 한 손, 끝없이 내 손을 붙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들의 손끝은 뜨거웠다. 나는 더 이상 마래터널이 두렵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들려줬던 그 시절처럼 부역자의 손을 더듬으며 터널을 빠져나왔다. 나의 할머니처럼.

-20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품, 소설 <백팩>에서 부분 발췌

마래터널을 걸으며 민간인에 대한 비정상적인 국가권력의 폭력성과 인권유린에 관한 여러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여순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그 배경에 대한 이해와 사건의 총체적 성격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구태여 소리 높이지 않아도 투어에 참여한 시민들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일행은 다시 사건관련자 학살지이며 여섯 개의 말줄임표의 비문이 있는 위령비 앞에 섰다. 그리고 사건관련자의 매장지인 형제묘를 거쳐 호명동 암매장지에서 투어를 마쳤다.

다크투어 참가자들이 형제묘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숙인

여순사건이 진압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당시 종교지도자, 문인들이 여수에 왔다. 그들은 좌익에 대한 만행과 희생자들을 강조했고, 경찰과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나 참상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봉기군의 사건을 편파적으로 부각시켰다.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반공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친정부성향의 글을 올렸다. 남한에 단독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던 당시 시민들은 모두 남북 분단이 고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묘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정숙인

여순사건은 14연대 봉기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잘못을 시정하고 싶었던 학생과 시민들의 ‘여순항쟁’이었다. 

여수는 임진왜란, 동학혁명, 의병활동 및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관광이 가능한 곳이다. 여순사건 사적지는 다크 투어리즘을 적용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장소적 현실감이 부족한 곳이 많았다. 

현대사와 관련된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여수는 여순사건 관련 특별법 제정과 추모 공원, 역사박물관 건립이 시급한 곳임을 확인했다. 당시의 수기, 증언록을 박물관에 전시함으로써 여순사건의 장소적 현실감을 보완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치권에서의 특별법 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라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위해서는 교육관 역시 필요하다. 

2018년 10월은 ‘여순항쟁 70주기’가 된다. 제주 4·3공원, 광주5·18민주화공원, 거창 양민 추모공원처럼 ‘슬프지만 살아있는 역사공간’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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