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1987년이었다. 불과 30년 전의 일들이 나의 기억속에서 아스라해져 있었다. 영화는 그 기억을 되새김하게 해 주었다. 그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영화의 표현은 차라리 당시의 현실을 더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개헌이 되었다. 박정희의 잔유물인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사라졌다. 동토의 얼음덩이 같던 정가에는 드디어 봄의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12월의 대선은 전국을 뜨겁게 달구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선 결과는 다시 쿠데타 주모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뜨겁게 달구어졌던 6월항쟁이 군사정권에게 마치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빚어내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선거결과에 대해 참으로 조용하게 수용하고 말았다.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이라는 지금의 헌법을 만들어낸 성과를 거두는데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을까. 그 뜨겁던 열망은 결국에 군사정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번 영화 ‘1987’을 본 후에 그 궁금증들이 어느정도 짐작이 되었다.
1987년 그해 선거직전인 11월 29일에는 KAL기 폭파사건이 있었다. 기억에도 생생한 마유미라는 이름의 김현희가 주범으로 되어 있는 사건이다. 승객 115명의 공중폭파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선거를 불과 18일 앞두고 벌어진 참사였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주범으로 잡혔다, 극독물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다가 회생시켰다는 등 언론보도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 온국민은 북한의 소행에 대해 다시 한번 치를 떨게 되었다.
왜 하필이면 그 시기에 맞추어서 테러가 일어나는 것이었을까. 테러에는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질텐데, 누구라도 좀더 머리를 굴리면 의심 갈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다. 범인을 잡는 과정도 너무 신속하게 나왔다. 결과는 각본에 있었던 듯이 그렇게 재빠르게 나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김현희는 1990년 3월에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4월에 노태우정권의 사면으로 풀려난다.
영화 1987에서는 말한다. 짜여진 각본대로 만들어내는 인간세상의 적나라한 모습이 나온다. 차라리 더했으면 더했지 싶다. 인간임을 부정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조작이라면 어떠한 결과물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몇사람의 이야기도 아니다. 중간실세들의 짜맞추기 각본이면 충분할 수 있다. 김현희가 가짜일 수는 없겠다. 김현희가 거짓말을 할리도 없다.
각본은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말리게 되는 그림은 얼마든지 그려질 수 있다. 어설픈 각본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좀더 윗선으로 그리고 더 윗선으로 올라가서 각본이 짜여지면 된다. 서로 입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2003년 'MBC PD수첩'에서 김현희가 진범이 아닐수 있다고 의문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10년 후인 2013년 1월 15일 MBC ‘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에 김현희가 출연해서 왜곡보도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김현희는 1997년에 자신을 경호했던 안기부 직원과 결혼했다. 어쩐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마치 정교하게 맞추어지는 퍼즐같은 이야기 들이다. 이런 퍼즐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을까. 그러나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김현희는 2010년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7월 20일부터 4일 간 일본을 방문해 일본인 납북자 가족을 만났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의 돈으로 시간당 천 만원에 가까운 호화 도쿄 헬기 관광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수많은 사실들이 퍼즐로 다가오는 것이다.
1987년 가을 12월 어느날 나는 광주역전 광장에 있었다. 임동성당쪽 길이었다. 수많은 인파는 역전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연단에는 YS가 올라왔다. 인파에서는 요란한 함성이 울렸다. 그것은 분명 환영하는 박수소리가 분명했다. YS는 연단에서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 순간 연단으로부터 30여미터에서 갑작스럽게 우수수 돌이 던져졌다. 내 눈에는 멀리서나마 그 돌 던지는 사람의 면모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였을까. 1987에 나오는 사복차림의 그들, 젊은 그들의 뒷통수를 따라가는 모든 이들은 안타까움의 비명이었다. ‘저래서는 안되는데......’ 그러나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그 다음날의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서특필이었다. 동서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가는 순간이다. 누군가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정권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장면정권을 탄생시킨 시민들에게 열기는 너무 갑작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장면정권이 붕괴된 것은 급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노태우정권은 이 급작스러운 변화에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민주화의 단초가 시작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간에 이렇게 흐름이 있었다. 잘못 꿰어진 단추에 의해 세상이 이상하게 되었다고 싶은 순간, 세상은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교하게 조정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흐름은 당위성이다. 그 위에서 나는 무대의 주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만큼은, 이제는 진정 이 흐름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민주는 다수 대중의 행복에 있을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진보네 보수네 하는 것도 결국은 다수 대중의 행복을 지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 다수 대중의 개념이 망각되고 있다. 영화 ‘1987’은 그 다수 대중을 위하는 그 길이 무엇이었을까를 내게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잃어버린 기억 속의 광주역전의 만행을 되새김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