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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최영대의 인간의 상호관계성과 불완전성

아르블르 갤러리, 30일까지

  • 입력 2018.01.16 15:53
  • 수정 2018.01.16 17:20
  • 기자명 유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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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적어도 인간 내면의 감정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필자는 한 표를 던진다.

이 말은 작가 최영대의 작품을 접하는 첫 번째 조언이 될 수 있다.

화가 최영대의 작품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렇다.(전적으로 필자의 생각) 그러니까 스릴러 영화의 스틸 컷을 한 컷 한 컷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도발적인 모습의 육체를 다룬 작품에서 더욱 그러한 느낌들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특히 이 작품 ‘the GRAVITY of prometteus’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 육체의 양면성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메테우스의 중력(the GRAVITY of prometteus)

우선 한 쪽의 면은 지극히 회화적인 인체의 크로키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면은 인간의 육체에 깃든 원초적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화면 속에 존재하지만 후자는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모두에 밝힌 바와 같이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뱃지(the badge of Mr.)

혼란스럽지 않다면 작품 ‘아저씨 뱃지(the badge of Mr.)’로 가보자. 화면을 가득 채운 형상은 어떤 남자의 두상을 그려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보자.바탕에서 발견되는 것은 어떤 문양을 차용하고 있고 사람의 형태는 깊이 고뇌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극히 평범한 회화 작품처럼 보이지만 범상치 않아 보인다. 그럼 이렇게 퍼즐을 맞혀 보자. 이 불완전한 사회의 한가운데서 고뇌와 번민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화면 속의 형상은 우리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절대 권력을 가진 불특정 다수일 수도 있다. 가장의 고뇌를 또는 절대자의 번민과 결단 같은 것들을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감과 관계성을 표출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최영대의 시선은 두 곳의 트랙을 달리고 있는 셈이다. 즉 회화적 구성의 구축과 그와 상반되는 정신적 가치. 즉 두 감정의 병존을 통해 메시지를 관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부한 공식의 작품 전개가 아니라 시선은 제한적으로 두면서도 회화적 변주가 교차하도록 유도하고 깊은 색채와 더불어 더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 주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가 서윤미씨는 최영대의 그림을 “현대 일상속의 평범한 실체적 이미지까지 동시 병치함으로써 인간이라는 거대한 시간성의 교차와 집약을 통해 인간 존재의 역사성과 관계성에 대해 대단히 깊고 낯선 꿈을 연출한다” 고 이야기 하고 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보완적 관계를 이루지만 각각 불완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최영대의 그림을 감상하고 나서 꽃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바라보겠는가?

학습효과는 전시장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혹시 전시장에 오신다면 이 그림‘flower genital’을 감상하면서 실험 해보기를 권장한다.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최영대의 작품 세계는 결코 가벼운 주제들은 아니지만 가벼운 자극에도 적절하게 반응하는 가장 이상적인 진정법처럼 혼란스럽고 탁한 우리네 현실 속을 관통하며 타자와의 공감을 위한 주제를 통해서 그의 작업은 조금씩 발현하고 있다. 향후 그의 작업은 회화적 표현을 바탕으로 멀티미디어와 결합하면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예울마루 끝에 걸려있는 저녁노을을 사랑한 그는 낭만주의자일까? 아닐까?

자꾸자꾸 헷갈리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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