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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여수출신 양영제와 소설 '여수역'

문학작품에 '여순항쟁'드물어, 각종 문화운동 형태로 많은 시도 있어야

  • 입력 2018.01.21 14:11
  • 수정 2018.01.22 15:09
  • 기자명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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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등장하는 ‘여순항쟁’은 그 동안 드물어서 관심

‘반드시 여순을 써보자’  결심 2017년에 ‘여수역’ 발간

그동안 ‘반공교과서’ 범위 안에서만 ‘여순사건’ 이해

‘여순항쟁’... 지엽적인 문제 아닌 초기 대한민국의 문제

‘항쟁’의 역사, 그 시발점이 70년 전 여수.순천이다.

70년 전 ‘해방됐으니 고루 잘살자’, 그런 생각을 몽땅 ‘빨갱이’ 취급

이제 ‘빨갱이 덧씌우기’ 벗어나야 할 때 ~ 

여순항쟁, 제주4.3처럼 전국적인 관심사로 끌어내야

민간의 문화운동 영역에서 해야 할 일 찾았으면

‘제2의 노근리’인 여수 안도 ‘이야포’ 양민학살, 소설로 낼터

소설가 양영제
편집자 소개글

소설 ‘여수역’의 저자 양영제는 대학에서 순수문학을 공부한 50대다. 여수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이후 과정을 마쳤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친구인 양영제의 소설 '여수역'을 여순항쟁 70주년인 올해  TV 대하드라마로 만나길 바란다고 본지에서 밝혔다. 곧바로 책도 소개했다.

제주 4.3은 2018년 70주년을 맞아 전국단위로 크게 움직이니, ‘여순항쟁’도 전국적인 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책 소개 이후 작가 양영제가 고향 여수를 찾았고, 본지 편집국에서 오병종 편집국장을 만나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이어졌다. 지난 9일 인터뷰 내용을 골랐다.

2017년 10월에 발간한 양영제 작 소설 <여수역>

그는 소설가로서 여순사건을 다룬 소설이 흔치 않아 “반드시 써야겠다”고 맘먹고 취재와 자료조사를 해오면서 여수와 전남동부지역을 자주 방문했다.

“여순사건을 다루는 세미나 같은 행사때 일부러 참가했고요. 거기서 유족회 분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많은 얘길 해 주셨습니다.  제대로 좀 써달라는 주문도 받았구요”

따지면 그는 70년 전 ‘여수 참사’ 그 그늘에서 살았다.

그에게는 살아 계셨다면 구순이 넘으셨을 어머니가 계신다. 생전에 여순사건에 대해서 파편적으로나마 당시 얘길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서교 운동장에 갔던 얘기, 여수에 '후생병원'이라고 있었는데 그 앞에 시체가 쌓여 있고, 피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럼에도 그는 통상적인 ‘반공교과서’가 서술한 범위 안에서만 이해했다. 하지만 서서히 더 깊이 역사를 이해할수록 그간의 서술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원래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저 역시 지배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죠, 사실. 그러다가 여순사건을 연구하면서 그 성격을 확실하게 알게 된거죠.  저도 그 전에는 그 사건을 보는 시각이 기존의 시각, 그러니까 지배권력층이 만들어 놓은 구도 안에서의 역사의식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지배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기자는 최근 주철희 박사가 여수 사회에 던진 질문을 작가에도 적용하려고 주철희 박사의 ‘여순항쟁 정명’을 전했다.

주 박사는 작년 '여수역사 바로일기' 강의에서 “이제 ‘여순항쟁’이라고 제대로 이름 불러야(정명)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가 해방이후 제대로 된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항쟁을 일으킨 첫 번째 지점이 여순항쟁이다. 그걸 여수 지역민은 자랑스럽게 여겨야지 ‘피해자’라고 하지 말자”고 했다.

양 작가도 같은 생각이다.

“제가 출판기념회 때도 같은 얘기했는데요, 여순사건을 자꾸 지엽적 사건이나 정서로 축소하면 안되고요. 이건 대한민국의 문제입니다. 해방 후에 나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다섯 가지 계파가 있었어요. 중국파, 소련파, 민족파, 친일파, 친미기독교파 이렇게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친미기독교파, 즉 이승만이 '친일파'까지 동원해서 자기들의 반공체제를 구축한 게 바로 70년전 '여수의 참사'죠”

그가 말하는 지배이데올로기는 바로 그거다. 반공제체 구축을 위해 70년전 여수의 참사는 철저히 정권 수립에 기여하는 ‘사건’으로, 또 기존 권력에 대한 ‘반란’으로 자리 잡아야만 했다.

“전두환이 광주를 딛고 정권을 잡았다면, 이승만은 여수와 순천을 딛고 정권을 잡은 겁니다. 주 박사가 우리의 역사의 첫 번째 지점이니 그걸 자랑스럽게 여겨야지 피해자라고 하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조합니다. 항쟁이라고 말해야죠“

양 작가는 ‘여순항쟁’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는 작년에 ‘여수역사 바로일기’에서 강의했던 주 박사 견해와 일치했다.

“만약 전두환이 5년만 하고 물러나지 않고 지금까지 장기집권 했다면 광주는 계속 '폭동'이라고 규정됐겠죠. 그 이데올로기가 굳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폭동’이 아니잖아요. 이승만이 장기독재를 하고 박정희로 이어지며 계속 반공 이데올로기가 전국민에게 주입되었습니다. 영화를 만들어 국민들을 세뇌시켰고 그게 굳어져버렸습니다.  

광주폭동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됐듯이, 여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수반란이라고 굳어지고, 애매한 ‘여순사건’으로도 굳어지게 해선 안됩니다. 민족주체성을 살리기 위한 '항쟁'인 겁니다. 제주도  4.3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순항쟁'과 '제주 4.3'은 쌍둥이입니다”

그러면서 양 작가는 우리 역사를 더 들여다 보자고 말한다.

“당시 해방 후에 미군정이 ‘한국 조선인들이 어떤 사회체제를 원하는가‘에 대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들 70%가 사회주의에 찬성했습니다. 여수도 마찬가지죠. 

근데 그 사회주의가 당시 정통 막스주의에 의한 사회주의가 아니고, 그저 일본에서 벗어났으니까 '우리 공평하게 살자, 서로 나누자' 이런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근데 당시 이런식의 사회주의 개념을 지금의 북한 3대 세습체제에 덮어씌운 겁니다. 그러니 당시 '사회주의' 단어만 등장하면 곧 빨갱이로 몰았죠.

이런 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즉 '빨갱이 덮어씌우기'를 지금까지 해왔어요. 이걸 벗겨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토지부분에서 그당시 미군정이 적산토지에 대해 분할해버렸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빨리 벗겨져야죠“

양 작가는 ‘빨갱이 덮어씌우기’에서 벗어나려면 역사학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문화운동이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들이 작품 ‘여수역’에서는 다 표현이 되었을까?

그는 ‘여수역’에서 자주 ‘여수 참변’이라는 표현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소설에서 작가는 일부 항쟁군인과 항쟁시민들의 ’통제되지 못한 감정‘은 인정하지만, 더 큰 문제점으로 이를 제압하는데 동원된 국가권력의 ’의도된 악‘의 실천을 서술하고 있다. 그건 '국가폭력'과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소설 '여수역'에 대한 이쉬움도 전했다.

“사실 제주도 4.3문학의 어떤 제시라고 보는 현기영의 ‘순이 삼촌’같은 작품이 여순항쟁 소재의 작품으로 많이 등장했으면 하는 게 바람이거든요. 제 작품도 그랬으면 싶구요. 그래서 처음엔 책을 두 권 분량으로 썼어요. 근데 요즘에는 책 두 권으로 펴내면 안본다길래(웃음), 한 권으로 줄였거든요. 그래서 많은 부분을 축약하다보니까 설명적 부분이 많습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압축할 수 없었죠. 출판사의 권유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그 부분 아쉬움은 있죠.”

그는 다음 작품에 대한 뜻도 밝혔다. 이번엔 섬 '이야포' 이야기를 준비중이다.

6.25전쟁 당시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에서 미국 공군 전폭기에 의해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으로서 아직까지 종결이 되지 않은 미궁의 역사적인 사건을 취재중이다.

“1950년, 8월 3일날 금오도 안도 미군 폭격기 사건 있죠, 이것을 쓰고 있거든요. 이건 제2의 노근리 사건이구요. 어쩌면 더 큰 노근리사건으로 봅니다.‘노근리 사건’은 기념관도 있습니다. 그것도 노근리 피해자 한 사람이 글을 쓴 노력으로 그렇게 된거든요. 나중에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야포 사건은 아무것도 없고 증언만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릴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금오도를 가서 증언을 다시 들어보려고 합니다.

이 일이 왜 중요하냐면, 미국 폭격기가 배를 격침시켰는데, 경찰들이 은폐하려고 배를 불태워버렸어요, 3일동안.  산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거기다 기름을 뿌려서 태웠는데, 왜그랬을까요?  저는 굉장한 의문이예요. 미국을 위해 왜 그렇게까지 은폐를 하려 했느냐는 거죠.  도대체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이길래... 이런 부분을 따져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말을 꺼내 강조하며 덧붙인 부분이 있다. 저자의 애향심까지 더해진 사명감에서 우러난 '여순항쟁 70주년'의 관심으로 여겨졌다. 어쩌면 출향 인사가 고향분들에게 촉구하는 메세지가 아닐까?

“우리나라 근현대 연대표에 '제주'는 있는데 '여수'는 빠져있습니다. 이건 말이 안되는거죠. 여순항쟁은 반드시 알려야 하고 그 알리는 방식에 있어서, 여수의 지역 인사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관료들에게 의탁하는 그런 방법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방식은 민중중심의 문화운동을 펼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공연입니다. 미술전, 사진전도 포함하구요,. 특히 노래공연 같은 이런 일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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