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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 박사, 손양원목사에 대한 잘못된 사실 바로잡아

20일 강연서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벗어난 역사적 관점 당부

  • 입력 2018.01.22 12:57
  • 수정 2018.01.22 16:56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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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손양원'의 포스터를 보여주며 강의하는 주철희 박사

지난 20일 저녁 6시, 대한성공회 여수교회에서 주철희 박사가 ‘고백과 참회의 강연회, 여순항쟁과 기독교 그리고 손양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주 박사는 “우리 지역에서는 손양원 목사를 사실에 입각해서 따져보는 일을 굉장히 거북스러워 한다”는 말로 조심스럽게 강연을 시작했다. 이어 과거 기독교통일학회 학술대회에서 그가 발제자들이 말한 오류를 하나하나 바로잡은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지금부터 손양원 목사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알아보겠다” 고 강연의 목적을 설명했다.

먼저 그는 “사랑의 원자탄(1949년 12월 24일 발행)은 전기임에도 1950년 9월에 죽은 손양원보다 일찍 쓰여졌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안용준이 지었다고 알려진 ‘사랑의 원자탄’이 손의원(손양원의 동생)과 안용준이 공저라고 기록되었다. 그는 "이들이 손양원이 죽기도 전에 손양원의 전기를 썼다”며 생전에 전기가 출판된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오른쪽 서적 '사랑의 원자탄' 에 대한 설명에 '손의원과 안용준 공저'라고 적혀 있다

그는 여수 애양원에 전시된 사랑의 원자탄 서적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희곡이 1949년 6월에 발표된 연극 ‘향’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손양원의 삶을 그린 연극이 손양원이 죽기 1년 3개월 전에 나온 것이다. 또한 그는 사랑의 원자탄에서 손동인,동신이 죽은 장면 역시 연극 ‘향’의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연극이 원본임을 지적했다. ‘사랑의 원자탄’ 초판은 안용준과 손양원의 동생 손의원의 공저이다.

또한 그는 ‘오페라 손양원’에도 왜곡이 많음을 지적했다. 박재훈이 창작하고 김희보가 대본을 쓴 이 오페라는 2012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되었고, 같은 해 6월 1부터 6월 2일까지 여수시 후원으로 여수 예울마루에서 공연되었다.

주 박사는 '오페라 손양원' 의 대본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시정하려고 노력해왔다.

 “한 관람객이 내게 ‘오페라가 당신이 말한 것과 다르다’고 연락해왔다. 그래서 내가 ‘그 대본을 사다달라’고 말했다.  그가 대본을 사왔다. 그가 오병종 여수넷통 국장이다. 이후 여수시에서도 6월부터 공연이 됐다. 서울 공연을 보지못하고 대본만 본 나는 여수시에 ‘대본을 수정하지 않고 공연하면 1인시위를 하겠다. 수정해달라’라고 공개서면을 보냈다. 그래서 여수시는 수정된 대본을 공연했다. 여기서 끝난 줄 알았는데 2016년 11월 7일, 부산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상영되었다”.

'오페라 손양원' 의 대본

그는 ‘오페라 손양원’이 대중들에게 ‘증오의 반공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했다. 그는 “기독교가 손양원을 내세워서, 타인을 보듬어주려고 하지 않고 누군가를 증오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것은 종교의 역할이 아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그가 지목한 오류는 손양원 목사가 순교했다고 알려진 둔덕동 공원에 적힌 ‘손양원 목사가 한센인 고름을 빨아 치료했다’라는 글귀다. 주철희 박사는 이 글 역시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주 박사는 한센인들을 치료하는 일은 애양병원 의사들이 진행했으며, 손 목사는 한센인들의 마음을 보듬어주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주 박사는 미국인 스노우가 여순항쟁 당시의 상황을 기입한 보고서가 종교위문단의 보고서 내용과 다른 점을 지적했다.

스노우의 보고서에는 ‘순천신부의 말에 의하면 ‘여수와 시민들은 토벌군이 들어올 때는 반겼지만 반란군이 들어왔을 때는 매우 반겼다. 특히 청년들은 14연대 반란군이 들어왔을 때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봉기군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따로 분류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한 천주교도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살해되지는 않았다’ 라고 씌여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순항쟁당시 반란군과 기독교인들을 몰살해서 죽였다’고 알려진 내용과 달리, 보고서에는 ‘선교의 신도급의 피해가 적다’ 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여수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닌 셈이다. 주 박사는 “그러니 지금 현재 교회가 우익들이 얘기하는 ‘신도들을 죽였다’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스노우가 별도로 작성한 보고서 내용

여수에서 손양원 목사를 ‘민족지도자’ 라고 칭하는 데 대해서 의견을 달리했다. 그 근거로 주 박사는 그가 인터뷰에서 ‘모든 사변이나 전쟁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 ‘천황제도에 대해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점을 들었다.

현재 손양원의 이력서에는 그가 여수 애양원 이외에, 1946년 2월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일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손양원의 본명 손연준) 이 역시 그가 여수 애양원에서만 일했다는 기존에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

손양원의 인터뷰가 기록된 책. 그는 여기서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별로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하고 있다

이날 여순사건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꼬집은 강연을 마치며, 주 박사는 “우리 스스로부터 ‘반란’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여순항쟁’ 단어가 일반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그는 “대한민국은 정부수립과정에서부터 반공에 길들여져 있었다. 내 뜻과 다르면 적이 된다. 다양한 생각이 공존할 수 없는 사회다”는 말을 하면서 그가 저술한 손양원 평전이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유를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반공문화가 진실을 볼 수 없게 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국민국가인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왕이 주인인 시대의 관점’으로 역사를 보고 있다"고 말한 그는 "(이제는)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시대여야 하고, 또 시민단체가 그 일을 앞장서서 이끌어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또한 “대한민국 항쟁의 역사에서 첫 서막이 바로 여수항쟁이라는 점에서 여수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지역에서부터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시민사회에서 올해 70주년을 맞으며 역사를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벗어나 바로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오늘 강의는 종교가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제대로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강의”라는 말로 강의를 끝마쳤다.

주철희 박사가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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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2019-02-27 06:27:12
여순반란을 항쟁이라고? 하하하하하하,.. 좌파들은 항상 앞뒤 다 잘라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거든?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어. 지금 북한에서 죽어나는 수많은 우리 동포들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남로당 반란군들이 저질렀을 짓거리도 상상이 되지... 저 자료들의 신빙성은 뭘로 증명할래? 증언을 한 사람들이 누구길래 우리가 그들의 말을 믿어야 하나? 그들이 봤다고 하는 게 다 객관적인 사실이기만 할까? 포용이란 생명을 존중하는 집단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북한정권은 계급차별에 따라 수많은 목숨을 죽였는데 그중에 제일이 기독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