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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여순항쟁, 송기득 교수의 회고

여순항쟁 때 멘토처럼 따르던 형을 잃고 신학의 길로

  • 입력 2018.03.02 17:32
  • 수정 2018.03.04 23:44
  • 기자명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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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오후 5시경, 주철희 박사(여순항쟁 연구자)가 송기득 교수(87세, 전 목원대 신학과)를 송 교수의 자택에서 만나 70년 전 겪은 여순항쟁 당시의 증언을 들었다. 송 교수가 계간 <신학비평너머>(2017 겨울호)에 그의 여순항쟁 회고담을 실었고 그 글을 읽은 기자의 주선으로 이 자리가 마련됐다.
 

주철희 박사와 송기득 교수 송기득 교수의 여순항쟁 회고를 듣는 주철희 박사
▲ 주철희 박사와 송기득 교수 송기득 교수의 여순항쟁 회고를 듣는 주철희 박사
ⓒ 정병진

 


주 박사는 여순항쟁을 다룬 <불량 국민들>(2013) <동포의 학살의 거부한다-1948 여순항쟁의 역사>(2017) 등을 펴냈으며 여순항쟁의 진실 규명 작업을 꾸준히 전개하는 중이다. 이 만남에서 송 교수는 여순항쟁 전후 분위기와 큰 집 형님의 억울한 죽음, 자신이 목격한 두 학생의 즉결처형 장면에 대해 담담히 들려주었다. 

그는 고흥 포두면 길두 출신으로 여순항쟁 당시 여수수산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 시절 여수수산중학교 6년제였고 항해과, 증식과 등이 있었지만 뚜렷한 학과 구별은 없었다고 한다. 중학생 송기득이 살던 곳은 돌산 장군도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당머리'였다. 지금은 '하모거리'로 바뀌었다. 

주 박사가 자신의 가까운 친구가 그곳에 살았고 지금은 신월동 어느 교회에서 목회한다고 하자, 송 교수는 수산중학교 시절 '신월동 비행장' 닦는 일에 동원됐던 기억을 떠올렸다. 일제 때부터 신월동에 비행장이 있었으나 해방 이후 정부는 확장공사를 한다며 어린 중학생들까지 동원했다는 것이다. 

주 박사는 여순항쟁이 1948년 10월 19일 밤에 발생했는데 그때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 물었다. 송 교수는 "그 저녁엔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몰랐다"고 했다. 다음날 학교 수업에 갔고, 중앙동 쪽에서 열린 인민대회에 참석했다고 하였다. "그냥 구경을 하러 간 정도는 아니었고 (군인들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가 보았다"고 하였다. "그 당시 중학 2학년이면 사회학개론 같은 책을 많이 읽었고 가난한 사람들 잘 살게 해 준다니까 그런 슬로건에 금방 동화됐다"고 설명했다. 

인민대회에 나가 보니 연단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 남자가 연설하는 중이었다. 마이크에 잡음이 많아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순 없었고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주 박사는 그가 여수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이용기였다고 확인하며, "자료를 보면 4명이 연설한 걸로 나오는데 목격한 다른 연설자는 몇 명이었는지" 물었다. 이에 송 교수는 "다른 연설자는 본 기억이 없다"고 하였다. 
 

순천만 산책 모처럼 화창한 날이라 좌담 전 송 교수가 순천만 갈대밭 산책에 나섰다. 그는 이 길을 산책하며 가장 큰 종교적 황홀경을 체험한다며 이 길에서 죽고 싶다고 하였다.
▲ 순천만 산책 모처럼 화창한 날이라 좌담 전 송 교수가 순천만 갈대밭 산책에 나섰다. 그는 이 길을 산책하며 가장 큰 종교적 황홀경을 체험한다며 이 길에서 죽고 싶다고 하였다.
ⓒ 정병진

 


송 교수는 10월 27일, 여수 앞바다에서 군함이 함포사격을 하는 장면도 보았다고 하였다. 장군도 앞에 살면서 군함의 함포사격을 생생히 목격한 것이다. 그 당시 해군의 함포사격은 위협과 경고를 하기 위한 용도였지 실제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함포사격에 놀란 나머지 땅에 엎드리지 않고 뒷산으로 피하였다고 한다.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송 교수도 하마터먼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한 순간을 두어 차례 맞았다. 24일, 여수 입구 미평 협곡에서 진압군과 봉기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수산학교 학생들도 총을 들고 토벌군과 싸웠다. 이때 3학년 이상 학생들만 참가하게 했기에 용케도 2학년인 송기득 학생은 빠졌다. 

주 박사에 따르면 이 '미평전투'는 송호성 준장이 이끌던 육군 부대가 순천을 진압한 뒤 미군 종군기자 2명을 대동하고 들어오다가 협곡에서 기다리던 봉기군(인민위원회와 지방좌익들로 구성)의 급습에 대패해 혼비백산하며 후퇴한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 종군기자 2명이 사망하고 송호성 준장도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입었다. 잔뜩 화가 난 송호성은 재진입한 뒤 미평지서에서 15명 남짓 민간인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진압군들은 가담 여부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조금만 거동이 이상하면 즉결처형을 일삼았다. 특히 학생들은 거리에 함부로 나다니지도 못할 정도 '빨갱이' 취급을 받아 처형당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송 교수도 줄곧 집에 숨어 지냈는데 어느 날 돌산도에 피신해 있던 학생 두 명이 장군도를 거쳐 헤엄쳐 오더니 송기득의 집 근처 폐선에 숨었다. 그들은 초소의 군인들에게 발각됐고 군인들은 이 학생들을 즉결처형하였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본 송 교수는 멋모르고 그 초소 근처까지 갔던 때가 떠올라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여순항쟁 당시, 송 교수는 자신의 수산학교 선배이자 멘토처럼 따르던 큰 집 형을 잃었다. 그 형은 수산학교 4~5학년쯤 되었는데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의과대학을 진학하려 준비하던 중이었다. 여순항쟁에 가담하지도 않았으나 사회주의를 신봉한 사실이 드러나 무참히 처형당했다고 한다. 
 

순천만 순천만 갈대숲
▲ 순천만 순천만 갈대숲
ⓒ 정병진

 


한편 여순항쟁이 터지기 보름 전쯤, '사랑의 성자'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가 송 교수가 출석하던 여수읍교회에 와서 부흥집회를 하였다. 부흥집회 기간 중 어느 날 밤 손 목사는 '나는 셋째'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 둘째는 이웃을 위해, 셋째는 나를 위해 살라는 요지의 설교였다. 

송 교수는 이 설교에 크게 감동받아 3학년 1학기 무렵, 대학까지 장학금이 보장된 수산학교를 그만두고 미션스쿨인 순천 매산학교로 전학하였다. 이는 부친을 크게 실망시킨 결정이었으나 가족들도 그의 굳은 결심을 꺾지는 못하였다. 순천매산학교로 전학한 이유는, 신학 공부를 해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기독교 학교에 다니며 인격 도야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순항쟁 직전 운명처럼 손양원 목사의 설교를 들었고, 광기어린 피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아 신학의 길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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