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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조선통신사 문서'로 조선-일본 모두 속인 대마도 번주

대마도 번주, 입장 난처해지자 문서 위조... 일본 교과서 여전히 '포로 송환 사절단' 잘못 기술

  • 입력 2018.03.08 20:02
  • 수정 2018.03.09 05:03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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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 번주가 위조한 문서
▲  대마도 번주가 위조한 문서
ⓒ 김문길

 


요즘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전이 치열하다. 살얼음을 걷던 한반도 정세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평화로운 분위기로 급선회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지만 신중하게 돌다리를 두드리며 가야한다. 속고 속이는 외교전이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배운 지식 중에는 조선통신사가 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왕실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조선왕조 개국 이후부터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까지 62회에 걸쳐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면 '조선통신사'란 이름이 처음부터 있었을까?

<다음백과사전>에 의하면 일본 열도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지 않고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시대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세종대부터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뒤 얼마 동안은 '통신(通信)'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부당하다며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3회의 사절단 행차에 '쇄환(刷還)'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간 포로의 쇄환이 주요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좀더 흐른 1636년(인조 14) 이후 통신사라는 명칭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 낀 대마도 번주, 양국의 문서 위조해
 
 대마도 번주가 위조한 직인
▲  대마도 번주가 위조한 직인
ⓒ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교수가 흥미로운 자료를 보내왔다. 일본과 조선 양국 사이에 끼어 입장이 난처해진 대마도 번주가 양국의 문서를 위조했다는 것.

임진왜란이 끝나고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에도막부를 세우고 대마도 번주 '소 요시도시'에게 명령했다. "조선국왕도 참석해 축하하라!"

명령을 받은 대마도 번주는 몸둘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전쟁포로로 데려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왕비 묘를 도굴한 범인을 잡아 보내라는 독촉도 있었는데 축하사절단을 보내라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조선을 따르자니 막부에게 목이 잘리겠고, 막부를 따르면 조선과 교류를 못해 경제가 어려워질 것을 고민하던  대마도 번주는 꾀를 냈다.

그는 가신 '야나카와 도시나가'와 의논 끝에 국서를 위조하기로 했다.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문서에는 임진왜란 때 잡혀온 포로를 송환한다는 의미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명칭을 정한 후 직인도 이정이덕(以政以德)으로 위조해 조선에 보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조선통신사' 이름으로 조선국왕의 문서를 위조해 보냈다. 봉서는 먼저 화해를 청하는 말이고, 봉복은 회답을 뜻한다. 번주가 일본조정에 보낸 <조선국왕봉서(朝鮮國王奉書)>는 조선이 먼저 화해하자는 의미로 위조해 보낸 것이다. 종이도 일본에는 없는 종이로 제작했다.

국서위조를 몰랐던 조선조정에서는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고, 일본막부는 조선사절단을 축하객으로 맞이했다. 1635년 도쿠카와 이에미츠 막부 시절, 대마도 번주 소 요시나리와 그의 가신 야나카와 시케오끼 간에 커다란 소동이 일어나자 야나카와가 막부에 위조사건을 고발해 두 사람은 징계를 받았다.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교수
▲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교수
ⓒ 오문수

 


조작된 문서와 위조된 도장은 지금 후쿠오카박물관에 있다. 위조된 도장은 수년전 경매에 나와 5억엔에 팔렸고 사가현 박물관은 모조품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일본교과서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막부 취임식을 축하하고 조공을 드리기 위해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조선통신사의 명칭은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지만 임란 후에는 '회답겸쇄환사'의 명칭으로 파견됐다. 이와는 다른 내용을 교과서에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전 나고야박물관 히로세 유이치 교수의 얘기다.

"'조선통신사'는 위작된 명칭이다. 원래 명칭은 '회답겸쇄환사'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일본교과서는 '조선통신사 왕래는 막부 장군취임식에 축하객이고 조공드리기 위해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원래 명칭대로 '회답겸쇄신사'와 '조선국왕사'로 후세대에 남기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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