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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에 이런 배경이

월파 최내우 선생이 26년간 기록한 일기장 <청파일기>의 전신인 유고집 <월파유고>

  • 입력 2018.03.20 11:22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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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공동게재 기사입니다.

▲ 임실문화원장인 최성미가 아버지인 최내우 사후 아버지 호인 '월파'를 인용해 <월파유고>를 발행했다. 생전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해 당시의 시대상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사회학적 자료이다 ⓒ 오문수

"아버지 호가 '월파'이고요. 아버지께서는 1969년 1월 1일(46세)부터 돌아가시기 하루 전인 1994년 6월 17일(71세)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셨어요. 매년 한 권씩 쓰셨으니 26권이죠. 일기를 쓰다 보니 어릴 때와 젊었을 적 일기가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60대 후반부터 옛 기억을 되살려 수필을 쓰셨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수필을 모아 자식인 제가 발행한 책이 <월파유고> 집입니다. 수필 속에는 아버지의 한 맺힌 이야기들이 절절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주 임실문화원을 방문했을 때 최성미 문화원장이 한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최성미 원장한테 "수필집과 일기를 보고 싶다"고 요청했더니 <월파유고>와 <일실항일운동사>뿐만 아니라 전북대학교를 비롯한 학계에서 집대성한 <창평일기> 4권을 보내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월파유고>를 펼쳐본 필자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책이 없으니 책을 다 읽고 나면 되돌려 달라"는 편지가 든 <월파유고>를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다음날에도 읽고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에서 일기내용을 분석한 자료도 읽었다.

 

완전하게 갖춘 일기는 사회학적 자산

일기는 한 개인이 일상의 경험과 느낌을 적어 놓은 기록이다. 개인의 생활은 자신이 속한 물리적·사회적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므로 그 시대 상황과 지역 사회의 특성이 담겨 있다. 특히 일기는 그날그날의 기록이기 때문에 어떤 자료보다도 사실적이다.

어떤 글이든 주관이 들어가지 않는 글은 없다. 특히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전기나 후세에 쓴 수필과 산문은 대상을 미화하거나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내우의 수필과 일기는 다르다.

월파 최내우의 학력은 11살에 입학해 17살에 졸업한 관촌초등학교가 전부다. 그의 글에는 한글과 한문이 섞여 있다. 한글이 서툴러 오타와 처음 들어본 사투리도 있어 읽기가 쉽지 않지만 오히려 각색되지 않은 그의 글에서 진솔함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수필가도 아니요, 시골에서 정미업으로 자수성가한 독농가 출신이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생활 주변의 문제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월파유고>가 필자의 관심을 끈 이유가 있다. 필자의 고향인 곡성과 임실은 직선거리로 46㎞ 떨어져 있고 자동차로 43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지리산준령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최내우가 살아 생존했을 당시에는 상호간 교류가 거의 단절된 곳이다.

문화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특성이 있다. 두 지역이 상호 교통하는데 장애물이었던 지리산이 연대감을 준 것은 소위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던 가난과 해방전후를 기해 좌우익으로 갈라선 이념전쟁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과 가까운 곡성은 빨치산의 출몰이 잦았고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로부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구전으로만 들었던 이야기들을 리얼하게 기록한 <월파유고>를 보았으니 단숨에 그리고 세 번이나 정독할 수밖에.

필자는 어릴 적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임실문화원에서 보내온 <임실항일독립운동사>를 읽고 나서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올라 소나무 줄기 끝부분에 있는 나무껍질을 벗긴 후 뼈대와 껍질 사이에 하얗게 들어있는 달짝지근한 속살을 벗겨먹곤 했다. "생키"라고 불렀던 소나무 줄기속에 있는 하얀 속살이 옛적에는 굶어죽지 않기 위한 대체식량인 줄은 몰랐다. 다만 어른들이 배고플 때 먹었다는 얘기만 들었다.

<임실항일운동사>를 보면 일제강점기 말엽 전세가 불리해진 일제는 한국인들을 철저히 수탈했고 먹을 것이 없던 사람들은 '생키'와 나무뿌리에 수수나 조를 섞어 먹었다.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은 이것들을 배설할 때 항문이 찢어져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었다.

 

처절한 가난과 멸시를 이겨내고 이장에 당선되다

▲ 최내우 생전 모습 ⓒ최성미

유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2~22쪽 -부친이 사망한 1927년부터 해방까지의 가족사

▲23~159쪽 - 해방이후 마을에서 일어난 좌우익간 이념대립과 6.25전쟁

▲160~230쪽 - 6.25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기록으로 아픈 가족사와 마을문제

어머니는 삭녕 최씨 가문의 후처로 들어와 자신과 동생을 낳았는데 부친이 일찍 사망하면서 자신의 가족이 집안과 형제로부터 홀대받으면서 살았다. 첫 장에는 '형우'라고 불렀던 이름을 개명해 '내우'라고 개명했던 일이며 일제의 소집영장을 받았지만 다행이 해방이 되어 해제됐다는 기록이 있다. 두 번째는 철없던 '어린시절'에 관한 기록이다.

"1927년 12월 20일 부친께서 별세하셨다. 그때 5세로 아버지 모습이 기억된다. 많은 문상객들이 모였으며 상복을 입고 만장과 만사를 들고 출상하는데 나는 아무 짬도 모르고 뛰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더욱 서럽게 우셨다. 겨울철에는 메밀을 확독에 갈아서 죽을 쑤어 먹었는데 돌이 찌걱거려도 배가 고파서 맛있게 먹었으며 그것도 부족했다."

 

극심한 이념갈등 시기에 최내우의 중립적 대처로 마을에 죽은 사람이 없었다

최내우의 형님은 구장(현 이장)이었고 최내우는 구장을 보좌하는 반장이었다. 해방이 되었지만치안과 법질서가 회복되지 못한 1946년 2월 26일 새벽에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관촌지서를 습격한 폭도 10여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곧바로 경찰서에서 파견한 기동대가 좌익분자색출에 나서자 사람을 은밀히 보내 혐의가 있는 이웃을 피신하도록 했다.

좌익혐의를 받은 지인을 살린 행위는 훗날 그에게 전화위복이 되어 돌아왔다. 형님이 이웃마을로 이사한 후 공석이었던 이장에 당선됐다. 당시 사회상을 보면 마을 이장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최내우가 살았던 생가 모습. 현재 최내우의 넷째 아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 오문수

"이장은 과거 일정 때 구장이라 했고 중도에는 이사장이라고 호칭했다. 일정 때는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독재독권으로 권리가 대단했고 식량도 많고 공출은 없었고 군·면직원이 책임완수라는 팔목에 완장을 두르고 오면 쌀밥에 닭 잡고 술에 진탕 먹이니 형(당시 이장)의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북해도, 화태, 복강현, 솔로몬 군도, 즉 남양군도, 북선, 만주에서 일반민 모집요청이 오면 면에서 강제로 끌어가고 그렇지 못하면 구장에게 일임하여 적임자가 선택되면 밤낮할 것 없이 데려갔다."

이장에 당선되어 어느 정도 치안이 회복될 무렵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7월 10일경 면 회의에 참석해 들은 내용이다.

"한국군은 준비 없이 갑자기 당하고 이북은 사전에 완전준비를 갖춰 내려왔다. 그리고 그 날이 일요일이어서 불리한 듯싶으나 서울만 들어오면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새끼나 다름없다."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있었을까? 흉흉해진 민심에 마을사람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이승만 정권에서 이장을 역임했던 경력은 인민군 치하에서는 목숨을 담보할 수 없었다.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끌려가 총살당하고 보복하는 공산분자들을 본 그는 "밤에 모르는 사람이 찾으면 깜짝 놀랬다"고 썼다.

목숨이 위태롭게 된 상황을 여러번 겪을 때 그를 살려준 사람은 2.26 사건 당시 경찰의 불순분자색출 작업시 목숨을 구해줬던 사람들이었다.

 

부패한 경찰과 맞서 격투벌인 최내우, 총 맞을 뻔하기도

최내우 고향은 빨치산 전라북도당이 있는 회문산과 30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6.25전쟁이 한창인 1952년에도 빨치산의 습격사건이 많았다. 그러자 창인리를 담당하는 지서장이 총기를 늘리고 국가에서 지급한 총기대금을 마을 주민이 부담하라고 했다.

어느 날 술집에서 지서장과 술을 마시던 그가 부당하다고 하자 권총을 빼든 지서장을 발로 차버려 문제가 됐지만 지역에 주둔한 국군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재에도 밝았다. 1946년에는 정미소를 설치하고 양잠업에도 뛰어들어 많은 부를 쌓기도 했다. 그는 세상인심에 대해서도 썼다. 어려울 때 이웃을 도와주면 "'생전에 잊지 못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세월이 가니까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썼다.

▲ 아버지 최내우의 수필집 <월파유고>를 출간한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 모습. 아버지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를 모아 <청파일기>4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내우의 자료는 임실문화원에서 보관 전시하고 있다. ⓒ 오문수

아버지의 <월파유고>를 펴낸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은 "이 책 내용 외에도 '공산당 주무자 전원 사망', '족보편집건', '취득세 뇌물사건' 등의 제목만 남기고 돌아가심에 더욱 더 아쉬움이 남습니다"라고 후기를 썼다.

최내우는 교통사고를 당해 1994년 6월 18일 10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일기를 읽는 동안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츠나니에키(F. Znanieki)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완전하게 갖추어진 개인 기록은 완벽한 사회학적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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