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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에 이런 끔찍한 뜻이 있었다니

최성미 임실문화원장과 함께한 임실여행

  • 입력 2018.03.30 15:09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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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신평면에 있는 신평생활사박물관 모습. 최성미 원장이 면장 재직시절에 건립했다 ⓒ 오문수

"'한 사람의 생각으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말 또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라북도 임실군 신평면에 있는 <신평생활사박물관> 도록 발간사(2007.12)를 쓴 이종태 부군수가 한 말이다. 이종태 부군수가 말한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현재 임실문화원장을 맡고 있는 최성미씨다.

지난 주말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과 임실군문화해설사 강명자씨와 함께 임실군내 유적지 몇 곳을 돌아보았다. 일행이 맨 먼저 들른 곳은 최원장 부친이 사셨던 신평면 창인리다.

임실 상류에 있는 섬진강 다목적댐 모습 ⓒ 오문수
임실에는 섬진강변을 따라 하동에 이르는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서울에서 왔다는 자전거 동호인들 모습 ⓒ 오문수

 

필자가 "아버님이 사시던 집을 보고 싶다"고 조른 이유는 70여년간 산 내력을 기록한 26권의 일기장과 수필집 <월파유고>를 남긴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임실문화원을 떠난 차가 나지막한 고개마루를 몇 개 넘어 창인리가 나타났다. 동네 뒤에는 예원대학교 캠퍼스가 있고 동네 앞으로는 섬진강 본류와 지류가 흐르고 있었다. 인근에 펼쳐진 논밭을 살펴보니 기름진 옥토다.

최성미 원장 부친이 살았던 생가 모습 ⓒ 오문수

창인리의 옛지명은 책평이다. 책평은 마을형태가 책을 펴놓은 것과 같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래서일까? 마을에는 필동, 서당골, 먹점, 벼루바위 등 책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책평 뒷산에는 예원대학교가 있고 졸음산이 있어 책펴놓고 꾸벅꾸벅 졸던 것을 연상해 '졸음산'이라 지은 이름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동네 앞에 펼쳐진 들은 넓은 평야가 아니지만 창평이라고 불렀다. 최원장 부친의 <월파유고>집을 보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이념갈등을 겪으며 가난을 이겨낸 조상들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차를 타고 신평생활사박물관으로 갔다. 면 정문에 연자방아를 얹어놓은 것부터가 여느 면사무소 모습과 달랐다. 연자방아 정문은 최성미 원장의 작품이라고 한다. 휴일이지만 당직근무 중인 직원의 허락을 받고 들어선 박물관에는 임실군 주민들이 평소 생활현장에서 사용했던 물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전시된 물품 중에는 고서, 고문서, 농기구, 생활용구, 부엌용구, 목공예용구, 가전제품, 구석기·중세기 역사물, 마을 유래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싸리나무 석짝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동행했던 강명자씨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싸리나무 석짝으로 싸리나무껍질을 벗기고 가늘게 엮은 후 한지를 여러겹 붙여 만들었다. 장롱이 없을 때 웃 등 중요물건을 보관하던 생활도구이다 ⓒ 오문수
최성미 원장 부친이 1970년대에 마을에서 가장 먼저 샀던 TV를 기증했다. 왼쪽에는 처음 TV를 본 마을사람이 저녁마다 안방을 차지해 밥도 못먹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최성미 원장 부친이 1974년 12월 14일에 쓴 <창평일기>에는 "내실에는 남녀노소가 방부터 마루까지 대만원이었다. 기분이 불안했다. 식사도 안했다"라는 기록이 적혀 있다.       ⓒ 오문수

 "이게 뭔지 아세요? 싸리나무 껍질을 벗기고 가늘게 엮어 만든 후 한지를 여러 겹으로 붙여 만든 생활도구입니다. 장롱이 없을 때 서민들이 옷 등 중요물건을 보관하던 생활도구입니다. 한지에 풀을 발라 겹겹이 붙여 완성하는데 이 한지를 '도모지(塗貌紙)'라고 했는데 나중에 도무지로 변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사형수들을 죽일 때 물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차곡차곡 발라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가면서 서서히 숨을 못 쉬게 되어 죽게 되는 끔찍한 형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생활속용품들을 수집 전시한 신평면생활사박물관

최성미 원장이 신평면 면장 재직할 때 면직원들과 힘을 합쳐 12개 마을별 유래와 생활용품을 수집 정리해 세운 생활사박물관은 대단한 가치가 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유적과 유물만 가치가 있는가? 전시품들은 내 어릴 때 사용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어 옛 추억을 되살리고 "그땐 저랬지!"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박물관을 완성한 최성미 원장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임실관내 유적지를 설명하는 최성미 임실문화원장(좌측)과 임실군문화해설사 강명자씨 모습. 뒤에 호암이 보인다 ⓒ 오문수

"박물관 조성과정은 '고집스러운 정신을 바탕으로 하다 보면 답이 나온다'라는 믿음으로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임실 운수사 김한창 주지스님의 자문을 얻어 시작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문화적 가치를 평가하기 전에 우선 내 주위의 모든 사물이 가장 소중하며 그것이 가장 한국적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평면생활사박물관이 임실군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전국에 소개하고 지역향토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박물관을 조성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면에 필요성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지만 피는 못 속이는 건 아닐까? 70년간의 기록을 남긴 아버님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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