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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 호적에 올라 유족이 되지 못한 기막힌 사연

[인터뷰]여순사건 희생자 유가족 장순자 씨

  • 입력 2018.04.05 16:08
  • 수정 2018.04.06 09:04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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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과 여순사건 70주기 합동분향소가 열렸다.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와 제주특별자치도 행정안전부 주최.  제주4.3,과 여순사건 70주기 여수위원회, 제주4.3범국민위원회,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여수지회 주관

여순항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김진수 시인)가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이순신광장에서 제주4.3과 여순사건 70주기 국민분향소를 운영했다.

여순항쟁은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중 일부가 동족을 살상하라는 제주 4.3 진압 출병을 거부하면서 봉기한 군인과 정부군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과 군경 일부가 희생된 사건이다. 

안산동에 거주하는 장순자 씨가 이순신광장 근처 카페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4일 국민분향소가 설치된 이순신광장에서 장순자 씨를 만났다. 그는 유족임에도 법적으로 유족을 증명할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1948년생인 장순자 씨는 여순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던 그해, 장 씨의 아버지는 순천사범학교 5학년이었다. 장 씨의 아버지는 손양원 목사의 동기다. 우리요양원 근처에 위치한 누나의 집에서 살던 장 씨의 아버지는 아침마다 파크호텔 앞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했다.

10월 19일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가던 장 씨의 아버지는 3학년 사촌동생과 같이 기차에서 붙잡혔다. 다행히 장 씨의 아버지는 경찰이 화장실 간 사이에 도망쳤다. 한밤중에서야 할머니를 보러 온 아버지는 다음날 학교에 가는 길에 다시 잡혀서, 순천농고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현재 여수시 안산동에 거주하는 장순자 씨가 여순사건과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여순사건 터지고 일주일 뒤에 돌아가셨다. 나중에 보니 돌아가신 분 중에 아버지 동기가 있더라. 여순사건이 10일 동안 벌어진 사건인데 막바지에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봄에 결혼하시고 9월 나를 낳기 전에 돌아가셨다.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장 씨의 부모는 장 씨를 낳을 당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태어난 지 한달 된 장순자 씨는 큰아버지 호적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왜 나만 큰아버지 호적에 올라있는지 이상했다. 그 당시 큰아버지 큰어머니 엄마 조부모님 모두 함께 살았기 때문에 외롭지는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장순자 씨는 큰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장 씨는 한번도 뵌 적 없는 아버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을까. 장 씨는 “부모님 결혼사진을 보았으며 결혼사실을 아는 지인들도 만났다”고 말했다.

이순신 광장에 설치된 여수4.3사건 합동분향소에서 장순자 씨가 헌화를 하고 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7월에 부모님이 학우들과 찍은 사진도 발견했다. 손양원 목사의 따님이 당시 ‘기독신우회’ 모임에 7월 단체사진을 올려놓은 것이다. 장 씨는 “그때 찍은 사진을 보고 아버지와 손양원 아들이 동기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후 어머니는 우연히 화양면에 살던 지인이 아버지를 사살한 군인을 만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장 씨를 업고 군인을 만나러 갔다. 

그 군인은 아버지를 순천농고 운동장으로 잡아가서 순천 서면 골짜기에서 불태운 날을 28일이라고 알려줬다. 그날 운동장에는 누구도 남아있지 못했다. 모두 산으로 데려가 불태운 것이다. 

그제서야 장 씨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운동장에 끌려간 그날까지는 살아계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장순자 씨의 가족은 아버지 기일을 28일로 정했다.

“그 군인은 아버지가 그에게 '나 좀 빼달라'고 한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평생 짐을 지고 살겠다’고 말했다“

유족회 관계자는 장 씨의 이 복잡한 가정사가 인정받아야 여순유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장 씨 호적정리가 먼저 끝나야 유족등록이 쉽다는 얘기다. 하지만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이미 7,8년 전에 돌아가셨고 장순자 씨 어머니마저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장 씨가 여순사건의 유족임을 증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2016년에야 장 씨는 순천에서 변호사를 만나 호적정리를 문의했다. 변호사는 “호적을 다시 팠다가 엄마에게 호적을 올리고 순자 씨만 친엄마 호적에 올리자”고 했다. 하지만 장씨는 포기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그 절차기 쉽지 않고 하는 말도 어렵고 절차가 복잡해서 포기했다.”면서 “특별법 통과되면 그때 다시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현재 장 씨는 공화동 휴게실 근처 유족회모임 사무실에 가끔 나간다. 매달 19일에 모이다가 이제는 많이 해결된 분들도 계셔서 올해부터는 두 달에 한번씩 모임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올해 칠순을 맞은 장순자 씨는 여순항쟁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장순자 씨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저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요. 위령비에 아버지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소원입니다. 4.3항쟁의 진상이 영원히 묻혀버리지 않고, 특별법이 통과되어 4.3희생자들의 억울함도 풀려서 여수도 제주처럼 역사가 정리되고 공원도 세워지기 바란다. 거기 아버지 이름이 올라간다면 바랄 것이 없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당시 실시한 1,2차 진상규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신청을 받지 못한 채 유족회에 들어갔다.

‘이명박근혜시절에는 4.3사건을 덮으려고만 했으니 아예 꿈도 못꿨다’는 그는 '이번 문재인 정부에서는 뭐라도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

이어 그는 본인 뿐 아니라 여수에 살고 있는 희생자 유족들의 이야기도 전했다. 특히 그는 “공화동 유족연구소 황순경 회장님도 여기저기서 뛰어다니며 일을 많이 한다. 타지에서 살고 있는 여순사건 유족자들 역시 매번 빠지지 않고 여수까지 와서 유족 등록 신청을 한다”며 유족회들의 간절한 심정을 전했다.

장 씨는 올해서야 유족회에 등록했다. 그는 “언젠간 특별법 통과되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다” 면서 제주에서도 한이 풀렸으니  “이번 정부에서는 여순사건 유족들의 억울한 한을 풀어줄 것이라 믿고 있다”며 절박한 믿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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