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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치고개 집단살해사건①

55년 가슴속에 묻은 아버지를 찾아서

  • 입력 2018.05.29 19:57
  • 수정 2018.06.21 18:07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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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이미 ‘구봉산 이야기’를 연재했던 필자 김배선(66)씨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저자이며 다음카페 '조계산 연구소' 운영자이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조계산 주변에서 6.25전쟁 직후 일어난 많은 이야가를 들었다. 산 속으로 피신한 민간인들과 이를 토벌하려는 군인들 간에 있었던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듣고 채록하여 메모로 남겼다. ‘빨갱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으려는 증언자들의 기피도 있었지만 친근함과 꾸준함은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소설형태를 빌렸지만 그가 채록한 증언은 생생하고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이제 김배선씨로부터 ‘조계산 구석구석에서 만나는 현대사’를 한편 한편 들어보자. 우선 '접치고개 집단 살인사건'을 소개한다.

 

 “이 보세요. 계세요~오.”

2004년 6월의 꼬리가 오두잿마루에 달랑달랑하던 날 한낮의 뙤약볕이 목덜미를 파고들 무렵에 주암 접치고개 산간마을의 이종진 영감님 댁 먼 마당의 대문 밖에서 주인을 찾는 경상도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큰소리로 울려왔다.

 “거 누구요~오?”

뜰방에 남아있던 부산질 비료포대를 경운기로 옮기던 이종진 영감님이 소리 나는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대답부터 먼저 보내는 소리다.

 “뭣 좀 여쫘 볼라고 찾아 왔십니더.”

고개를 들어보니 낮은 돌담사이 녹색페인트를 칠한 철 대문 위로 여자의 머리가 보이고 그 뒤에도 사람이 서 있었다.

 “뭘 물어 본다고~오?”

귀가 좀 어두운편인 이영감은 손님의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습관처럼 되묻는 소리를 보내고 나서는, 거~ 문 열려 있소~오, 그러면서 느린 걸음으로 손님을 맞으러 대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이 열려 있다고 했으니 의례히 문을 밀고 들어 올 줄 알고 천천히 걸어갔지만 끝내 들어오지 않고 서있자, 뉘신디 어떻게 오셨소? 들어들 오시시오~오, 하면서 대문을 열어주자 주인을 찾았던 60대로 보이는 몸집이 뚱뚱한 여자의 한 발짝 뒤에는 젊은 남자가 사내어린이의 손을 잡고 서서 몹시 궁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서도 짐짓 머뭇거리던 그들이 아주머니가 젊은이를 향해 고갯짓을 하자 모두 영감님을 따라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접치마을      ⓒ김배선

 “누추허지만 이리들 좀 앉으시오. 촌에는 다 요렇게 사요.”

마당 안쪽의 비닐 장판을 덧대 입힌 평상위에 올려져있는 낡은 플라스틱 바구니들을 밀쳐내고 자리를 권하였다.

 “인자 날씨가 더와 질라 그러요~오. 요새는 전에 보다 더위가 빨리 온 갑서라.”

7월을 앞두고 더위를 느낀 때문인지 아니면 시골 노인의 손님에 대한 인사 차림인지 이 영감님의 말 수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손님들이 선채로 영감님을 바라보고만 있자 알았다는 듯이 흙 때가 가득 묻은 장화를 벗으며 안쪽을 향해 여기 이봐~ 음료수라도 좀 내와 봐. 하고서 평상의 안쪽으로 올라앉는다.

 “아저씨 옛날 이 동네 살던 하쌍수라고 아십니꺼?”

아주머니가 입속에 맴도는 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꺼내 물었다.

55년 전에 이 마을에서 험하게 죽은 하쌍수의 이름을 낯선 여자가 밑도 끝도 없이 물어오자 말문이 막히고 당시의 생각이 이 영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디 어째서 그걸 물어 보시오?”

마음속으로 과거를 더듬으며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다.

아주머니도 역시 곧바로 입이 열리지 않은지 눈길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가 영감님의 얼굴로 돌아와 멈췄다.

 “우리 동네 요 우에 살다가 오래전에 죽었는디 알기는 아요 마는…”

 “하쌍수 씨가 우리 아부집니더.”

 “뭣이라고! 그러먼 자네가 딸 옥숙이란 말이여?”

엉겁결에 이름이 튀어나와 버렸다.

하쌍(상)수가 죽었을 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지가 하옥숙입니더.”

생각지도 못했는데 자기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니 눈물이 왈칵 쏟아 질듯 목이 메어 왔지만 당시의 일이 이 마을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얼마나 가슴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그는 짐작하지 못하였다.

나이 차이가 제법 있지마는 깍듯이 자신을 낮추는 것은 평상시 낯선 사람을 대할 때 하는 몸에 밴 말 습관이기도 하지만 어릴 적 비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이라도 찾아보자고 이미 잊어 버렸을 세월이 흐른 뒤에 고향을 찾아온 온 딸의 정성에 감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따! 이것이 무신 일이다냐. 그때 옥숙이가 열한 살이나 됐을 것인디. 그때 부산으로 간다고 들었던 것 같은디 어떻게 살다가 요렇게 찾아 왔소?”

반갑고 신통한 마음에 저도 몰래 목청이 높아가고 말이 빨라졌다.

 “예 그때 어무니 따라 부산으로 가서 어렵고 어렵게 살았지예.”

 “어머니는 어떻게 되고? ” 이 영감님의 목소리가 더 급해 보인다.

 “어무니는 얼마 안 있다가 돌아 가솄십니더.”

 “어쨌든 반갑소. 이 사람들은 누구고?”

평상이 좁아서인지 분위기가 낯설어서인지 계속 한 발치 뒤에 서 있는 젊은이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야 야아, 인사 디리그라 우리 사위하고 손잡니더.”

사위의 인사를 받으며 사우허고 손지가 참 잘 생겼구만 하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자세를 취하다가 그대로 앉았다.

그때 주인아주머니께서 짝짝이 그라스 네 개와 오린지 주스 상표가 붙은 1.8리터짜리 페티 병을 담은 쟁반을 내려놓으며 요 동네는 가게고 없어서, 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병마개를 따려하자 옥숙이 아주머니가 사양을 하며 두 손을 내밀어 받아 들고 그대로 내려놓자 종진이 영감님이 팔을 뻗혀 병을 들어 세 사람 잔에는 가득 채웠으나 자기 그라스에는 반도 따르고 않고 어서 들라고 권하였다.

접치재사거리         ⓒ김배선   

그사이 엉덩이의 끝을 디밀고 걸터앉아 있는 젊은이 곁에 붙어있던 손자 놈이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마당으로 걸어가자 두 사람의 이야기분위기가 심각해서 인지 자리가 불편해서 인지 사위도 아들을 따라 일어섰다.

 “그래 어린나이에 객지에 가서 고생이 참 많았겄소.”

 “그때 전쟁 통에는 다 그랬지요 뭐~어.”

 “그래 지금은 살만 허시요?”

 “예~에, 사위랑 손지도 보고 잘 삽니더.”

 “참 잘했구만!”

집 앞에 들어설 때 같아서는 아무 말도 필요 없이 아버지이야기만을 묻고 싶었지마는 웬일인지 입을 열려고 하면 다른 이야기가 돌아 나오고 말았다.

 “첨에 갔을 적에는 고생이 말도 몬했십니더 마. 가자마자 전쟁이 나갖고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친척집에도 몬 있고 영도 남항동 항도극장 옆에서 남의집살이로 어찌어찌 얻어 묵고 살았는데 거그서 어무니하고도 헤어지고 말았고 전쟁 끝나고는 고무신공장이고 어디고 안 다닌 데가 없었지예~에.

그러다가 서방 만나갖고 초랑 우게 수정동 산먼댕이 하꼬방에서 살다가 한30몇 년 전에 반여동으로 철거를 해가서 그때부터 집 지니고 잘 살고 있십니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영감님은 자기도 몰래 측은지심에 빠져 짠한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참 나 좀 봐라! 아부지 물어 보로 왔다고 그랬제.”

 “그때 아부지 돌아가실 때 일을 조끔 기억허신가요?”

 “아니 예, 산으로 데꼬 가서 총 맞고 죽었다는 것 배께는 생각이 안 납니더. 학교 갔다 오니 어무니랑 동네 사람들이 울고 그런 것 배끼는요. 혹시 아부지 묏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꺼?”

아마도 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늘 앞섰지만 고향사람들의 인정을 믿는 기대에서 여태까지 참아 왔던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에 대한 옛 기억을 토막 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이종진 영감님이 대답을 하기 전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실은 처음에 쌍수 딸이라고 할 때부터, 즈그 아부지 묘를 찾으러 왔는갑구나, 생각을 하고 어떻게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인가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쌍수가 죽은 것이 반란군시절인 6.25전해 세상이 시끄러울 때 동네아래 저수지공사장에서 일을 하였는데, 인부들 중에 외지에서 온 사람들 한 20명을 공비들과 내통했다고 지서에서 잡아다가 마을 위 고개로 끌고 가 모두 총살을 하여 가족이 찾아온 몇몇 사람은 시신을 옮겨갔고, 그렇지 않은 시채들은 모두 대강대강 보이지나 않을 정도로 묻어 주었기 때문에 한참까지는 그곳이 묘라는 것을 동네사람들 다 알아 봤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때 묻은 사람들이나 그곳이 묘라는 것을 기억할까.

접치재 옛 국도 학살지   ⓒ김배선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알아볼 수 없는 산비탈로 변해버렸기에 차마 그곳으로 어떻게 안내를 하나, 하는 미안한 생각도 들었고 살기가 곤란해서 여태껏 찾지 못하기도 하였겠지만 빨갱이라는 굴레가 무서워서 가슴에 안고 망설이기만 하며 잊으려고 노력하다가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어지간히 잊고 살만할 때도 되었을 텐데, 늙어버린 딸이 그 먼 곳에 살면서 굳이 찾아 무얼 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결심을 굳히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고개우로 올라가면 뫼 흔적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요 마는 여지껏 잊고 살았으먼 차라리…”

무심코 나와 버린 말이 걸려 잠시 멈추고 한차례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뭐할라고 꼭 찾으실라 그러요, 하고는 눈치를 살폈다.

이런 말은 세상을 살만큼 산 사람간의 교감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하옥숙 아주머니(할머니)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55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복잡했던 감정을 삭이는데 어지간히 단련 된 것이리라 짐작이 되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 마을에서 최고령인 90이 넘은 이웃집의 이두일 노인과 할머니 한분이 언제 왔는지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마루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계속)

 

접치마을 입구(노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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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범 2018-05-30 21:15:09
이미, 몇해전 조계산에서 만난 이야기와함께, 구봉산 이야기를 연재했던
저자 김배선의 이번 작품은, 선암사 접치고개에 얽힌 이야기들을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로,재미있게 전개해 가면서 그 옛날을
반추하게한다.

무릇 사람이 한 生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歷史를 알아야 현재와 더불어 미래도
꿈꿀수 있다고 하지않은가 ?
아뭏튼, 건강한 마음과 정신으로 또다시 펜을 잡은 작가에게 끝임없는 열정과
애정으로 연재해 주기를 주문하며, 소리없는 박수와함께 건투를빈다. ^^-
- 하늘빛-
하늘빛 2018-05-30 20: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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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 2018-05-30 20: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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