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주철희 박사 '여순항쟁은 역사이다' 주제로 강의

8일, ‘작가양성과 책 출판 아카데미’ 마지막 15강 열려

  • 입력 2018.06.09 20:43
  • 수정 2018.06.11 07:18
  • 기자명 전시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일, 시민감동연구소에서 주철희 역사학자의 ‘작가양성과 책 출판 아카데미’ 강의가 열렸다

8일, 시민감동연구소에서 ‘작가양성과 책 출판 아카데미’ 마지막 15강이 열렸다.

이날 강의는 「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의 저자이며 여순항쟁을 비롯한 국가폭력과 반공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주철희 박사가 진행하였다.

주 박사는 강의에 들어가면서 “여순항쟁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당시 군대조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여순항쟁의 시작점인 군대조직 14연대를 설명했다.

1945년 해방된 이후 줄곧 미군정이 다스렸기 때문에 국군이 따로 정비되지 않았던 남한은 국방경비대 조직에 들어갔다. 1948년까지 각 도에 하나씩 연대를 만든 남한은 그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미군정 철수가 결정되었다. 남한은 미군정 철수에 대비하여 연대를 5개 추가했고, 그렇게 늘어난 연대 중 하나가 여수의 14연대이다.

14연대 주둔 위치

주철희 박사는 우선 세간에 알려진 “14연대 3천여명의 반란”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당시 군대 구조를 설명했다.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14연대의 1대대였고 1대대 밑에는 또다시 4개 중대와 소대가 있으므로 14연대는 12개의 중대가 있었다. 즉, 1개 연대의 중대는 약 2800명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일반적으로 알려진 ‘14연대 3천여명의 반란’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고 그는 말했다.

당시 모병제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군대 인원을 다 채울 수 없었다. 28만 밖에 안되던 제주도는 1개 연대 인원도 못 채우는 상황이었다. 군대를 입대한 사람들조차도 집에 밥숟가락 하나 줄이기 위한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주 박사는 14연대에 최대 2천300여명의 군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산했다.

오른쪽부터 '표창장 '이라는 한자와 '제3여단(부산)', '임익순(오른쪽에서 세 번째 줄)'이라는 한자가 보인다

그는 제3여단이 주둔했던 부산의 모든 지역신문을 뒤진 결과 표창장을 받은 임익순 관련 기사를 찾아냈고, 그가 지리산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주 박사는 이후 계속 여순사건 관련 자료를 찾아냈다.

그가 발견한 김형도 목사의 저서 「여수의 풍란을 겪고 와서」 역시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하던 김영도 목사는 4연대에 군납을 하는 친척에게서 경비를 도움받으러 내려와 10월 17일부터 30일까지 여수에 머물렀다. 이후 1949년 12월, ‘기독교와 가정’이라는 잡지에 실린 김 목사의 글은 그가 직접 보고 들은 당시 여수의 참상이 담겨 있다.

실제 김형도 목사가 기고한 글은 당시 여수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여수호텔에 여장을 푼 그는 14연대를 방문하여 열악한 근무환경을 직접 목격했다. 김 목사는 군인들의 불만이 ‘열악한 근무환경과’과 ‘제주도 출동’ 두 가지로 추정하고 저서에 ‘여수사람들은 사상과 신앙에 무관심하고 반란이 사상을 토대로 이뤄진 게 아닌 것으로 보임’이라 기록했다.

또한 본인이 목격하지 않은 대목은 ‘(누구에게서)들음’ 이라고 명확히 표시하여 신뢰도를 높이기도 했다. 20일 오후, 그가 시민대회(인민대회)에서 듣고 기록한 연설자들의 연설 내용 역시 당시 미국 대사가 쓴 ‘여수반란의 고찰’과 매우 흡사하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목격한 시신은 반란군인과 학생들이다. 그렇다면 군과 경찰이 시민들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주 박사는 “이런 이유로 김 목사가 저술한 이 책이 매우 소중한 1차 사료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형도의 '여수의 풍란을 겪고 나서'. 세계 기독학생화 지도자 대회 대표로 참석한 김형도가 여순항쟁을 직접 경험한 후 기고한 글이다

김형도 목사 외에도 국문학박사이자 천주교 신부인 윤을수(로렌조 신부)도 여수로 계몽단을 내려보내, 보고서를 작성하게 지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이 보고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이미 이승만 국가가 개입되어 있어, 할 수 없이 윤 신부는 보고서 외에도 경향잡지에 별도의 글을 기고했다.

윤 신부가 1948년 12월호 경향잡지에 기록한 글을 보면 ‘여순과정에서 교우 몇 명이 반란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쓰여 있다. 즉 군과 경찰이 사살했다는 의미이다. 이외에도 ‘기타 교회와 일반 교주는 무사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보고서에도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글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주 박사는 이를 근거로 지금까지 여순항쟁에 관련된 기독교인들의 말은 왜곡이라고 설명했다.

주 박사는 위와 같이 당시 기록문들을 시청각 자료로 활용하여 강의 참가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언젠가 주 박사는 KBS와 법제처를 찾아 특별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를 따진 적 있다. 법제처는 ‘반란’이라는 단어가 특별법 제정이 불가능한 이유라고 밝혔다. 법제처는 “반란은 체제 전복이나 정권탈취가 이유이므로 이들을 위한 특별법은 만들어 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애초 법제처의 이러한 주장은 국방부의 주장을 따랐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국방부는 절대로 여순항쟁특별법을 제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14연대는 반란이며 자신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처형한 적 없다는 것을 들었다. 게다가 여순항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성균관대 김득준 교수와 여순항쟁을 공부한 조선대 노영기 교수 역시 국방부의 주장에 답을 하지 못했다.

전남일보가 펴낸 '한국전쟁사'와 1975년 유신체제 홍보물로 제작된 책자 '광복30년',

국방부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을까? 바로 이 두 책이 근거였다. ‘한국전쟁사’와‘광복 30년’(전남일보).

주 박사는 “두 책이 쓰인 시기를 살펴보면 믿을만한 사료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사’는 1967년 쓰여졌다. ‘광복30년’이 발간된 1975년은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실행하여 영구집권을 잡은 시기로 각종 홍보책자가 마구잡이로 발간되던 시기였다. 그런 책을 전남일보사도 발간한 것이었다. 즉, 철저히 박정희의 반공에 입각한 왜곡된 책자인 것이다.

즉,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 역시 왜곡 투성이다” 라고 주 박사는 말했다.

순천 탈환

당시 잡지 ‘신천지’를 보면 10월 21일에 정부가 여순발발 기자회견을 한다. AP통신을 비롯한 설국환 기자 5명이 여수로 내려갔고, 이후 설국환 기자는 신천지 11호에 답사기를 실었다, “우리가 탈환된지~ 우리가 처음 본 광경이”라고 기록되어 순천을 탈환한 국군도 점령 초의 수 시간 동안 공산당원에 못지 않게 야만적으로 읍민을 취급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답사기를 보면 국군이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실제로 칼 마이던스가 찍은 10월 24일의 사진에는 ”총탄자국이 몸에 점처럼 찍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칼 마이던스
합동통신 설국환 기자

1948년 10월 19일에 벌어진 여순사건은 끝점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9일간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가 54년 9월까지 벌어졌다고 보는 이유는 이 시기가 금족령이 (한라산 통행금지 해제)실행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순항쟁의 마지막 시기는 지리산 입산 통제 시기인 1955년 4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 박사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보도연맹 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희생자에 포함된다.

주 박사는 “여순항쟁과 제주4.3항쟁에서 국군이 진격한 이유는 진압이 아니라 토벌이 목적”이라 설명했다. 즉, 무력행위인 ‘진압’이 아니라 무기를 사용한 ‘토벌’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국군도 스스로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라고 지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명백한 역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지역 보훈단체는 아직도 여순항쟁 가담 시민들이 경찰과 우익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항쟁’이라는 명명을 거부하고 있다. 주 박사는 이들의 이런 주장은 옳지 않다며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라는 신채호 선생의 발언을 인용해 “당시 민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폭력 뿐”이라 단언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는 여순항쟁 가해자의 85%를 군인으로, 빨치산을 비롯한 좌익활동가는 불과 10%로 추산하고 있다.

특히 군법에 의한 사형은 오동도와 만성리에서 대부분 일어났으며, 나머지의 7,80%는 대전형무소, 10%는 공주와 광주형무소에서 사형당했고, 소년병들은 김천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고 추산된다. 즉, 군인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주 박사는 강의를 마무리하며 최근 국가권력으로 희생된 백남기 농민과, 세월호 사건을 예로 들며 국가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전두환 사면도 옳지 않은 행위"라고 말했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에서 한 연설도 그는 “빵점짜리 (연설)”라고 말했다.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은 누구도 할 수 없다. 희생자들이 ‘이제 됐소’라고 해야만 해결됐다고 할 수 있다”며 “이것은 권력남용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는 독일총리와 여전히 나치의 부역자들을 처형하고 있는 프랑스의 상황을 한국과 비교하며 분노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은) 빵점짜리 연설” 이라는 것이다.

여순항쟁에서 총살당하는 시민들

그가 오랜 시간 여순항쟁 역사강의를 하고 있는 이유는 참가자들이 단순히 과거를 이해하기를 바래서가 아니다. 그는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여순항쟁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오늘’에 대입하여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저 과거의 일을 오늘날 다시 곱씹어보는 식의 역사 강의는 의미없다”고 단언했다.

즉, 역사를 배운 사람들이 현재의 정부를 비판하고 북한 체제를 이해하며 여수시장을 비판할 수 있는 넓은 시각을 갖춰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근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여수시장 후보들이 선거출정식을 자산공원 현충탑에서 실시한했고 뒤이어 현충일에도 이곳을 또다시 방문했다. 주 박사는 이렇게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명예를 지켜주어 고맙지만, 한편으로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을 기리는 날은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주 박사는 “광주 희생자는 200명이고 여순항쟁으로 죽은 사람은 그 몇 배이다. 그런데 여수의지방자치를 이끌어 갈 여수시장 후보들 중 70년 전 이곳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약 2만 명의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거나 그들의 역사를 다시 써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며 역사인식에 몰지각한 후보들을 비판했다.

한편 실제 여순항쟁이 벌어진 시내 곳곳을 직접 방문하는 답사가 10일 열릴 예정이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