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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인문학 일자리사업', 여순항쟁 여수시내 답사

주철희 박사 안내로 마지막 15강은 현장에서

  • 입력 2018.06.11 07:16
  • 수정 2018.06.13 19:01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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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감동연구소 '청년인문학 일자리 사업' 마지막 15강이 지난 10일  '길 위의 역사와 마주한다' 는 주제 아래 현장답사로 진행됐다.

이날 참가자들은 주철희 박사와 여수 시내 곳곳에 퍼져있는 여순항쟁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참가자들은 오후 2시에 여수시청 1청사에 모여 대형버스를 타고 14연대 주둔지부터 마지막 장소 손양원 목사 순교지까지 여순항쟁관 관련된 장소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한화공장 내 14연대 지하벙커

맨 먼저 14연대 주둔지 중 수상비행장 내 지하벙커를 둘러보았다. 일제는 호남지역의 쌀과 면화를 수탈하기 위해 전라선을 새로 만들었고 이후 여수에 해군 202부대를 주둔시켜 군사 장소로 이용하기에 이른다.

그러다보니 지하벙커에 화장실을 설치하고 물을 보관하는 등 해군202부대의 모든 생활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이곳은 일제 군사들이 군수품을 싣고 가는 요새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화약 공장은 방위산업체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이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한화는 다섯개의 격납고를 아직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수상비행장의 활주로. 이날은 물이 비교적 많이 들어온 상태다.

지하벙커 근처에 위치한 수상비행장 역시 일제시대에 만들어졌다. 이곳 수상비행장은 만조에는 활주로가 보이지 않지만 물이 빠지면 형태를 들어낸다. 이 활주로의 길이는 200m가 넘는다고 주철희 박사는 설명했다.

바다에 콘크리트를 부을 수 없다보니 일제는 다른 곳에서 콘크리트를 굳혀와 블록처럼 쌓아 격자무늬 활주로를 만들었다. 이후 이곳 비행기들은 산 뒤의 격납고로 이동됐다.

주 박사는 이렇게 중요한 장소를 표지판 하나 세우지 않고 방치하는 여수시의 태도를 우려했다.

이곳은 당시 아주 좁고 비포장도로였기 때문에  시내로 진출하기 매우 어려워 14연대 군인들은 구봉산의 능선을 타고 신월동으로 이동했다.

당시 14연대는 매우 규모가 커서 하수종말처리장부터 멀리 히든베이건물까지 전부 14연대였다.

이후 14연대 봉기군들이 구봉산 능선을 타고 여수시내( 지금의 신월동 대주아파트)로 진출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세운 서초등학교 팻말

다음 장소인 서초등학교는 부역자의 즉결처형이 이뤄진 장소다. 당시 시내가 한눈에 보이던 이곳에서 26일부터 30일까지 부역자색출이 시작됐다. 

27일 대대적인 폭격이 벌어져 여수는 토벌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건물들만 남았다. 이곳에서  손가락총에 걸린 사람은 부역자심사를 거쳐 학교 뒤편 학살지에서 처형당했으며 군법회의가 열리던 여수여중과 여수여고 자리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강요당했다. 

몇몇 사람은 종산초등학교에서 고문을 당해 자백을 하게 만들어 만성리에서 처형했다.

정숙인 소설가가 서초등학교 팻말을 사진 찍고 있다
과거 14연대에서 만들어진 군수품을 현재 미평으로 싣고 가기 위한 철도선이 놓여 있던 길

구 여수시내 일원에도 일제시대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1948년 당시 육로는 단 하나 남았다. 이 길을 통하면 미평을 지나 충무지서까지 갈 수 있었다. 

당시 지서 근무자는 최대 열명 정도 뿐이었기 때문에 14연대는 교전을 통해 이들만 사살하고 다시 길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학살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수경찰은 당시 72명이 죽었다며 아직도 이들을 위해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경찰이 사살당했다는 말에 여수경찰서장이 긴급하게 30여명의 경찰들을 소집하면서 이곳 충무지서에서 첫번째 봉기군과 경찰의 교전이 일어났다.  이후 14연대 군인들은 여수역으로 향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1948년 당시의 길

현재 전라좌수영 뒤편 동헌을 복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철희 박사는 '복원'이라는 뜻을 다시 살펴보고 사용할 것을 경고했다. 진남관은 과거의 자료들이 남아있어 당시 그대로 실측하여 지을 수 있어 해체복원이라는 표현이 맞지만 동원은 남아있는 자료가 없고 건물의 층수만 파악될 뿐이므로 여수 '동헌'의 경우에는 재현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순천 역시 읍성을 복원한다고 하지만 복원할 재료가 없는 상황이므로 재현이 맞다고 말했다.

'통만두집' 자리는 과거 호남 지역에서 최초로 발행한 지역신문 '여수일보' 가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지어진 조선식산은행.  제170호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진남관 앞에서 참가자들이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여수시내 모습

다음으로 '형제묘'를 찾았다. '형제묘'에 묻힌 125명의 사람들은 4차 군법회의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이유로, 즉 '정상적으로혐의자를 처벌했다'는 이유로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이 되지 않았다.  형제묘는 경찰관과 이곳에 묻힌 이정 최문자 씨 어머니의 증언으로 발견되었다. 최 씨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아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형제묘 앞에서 참가자들이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형제묘 표지판
만흥동에 자리잡은 형제묘 

여순항쟁 답사 마지막 장소는 손양원 목사 순교지였다.  주 박사는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가 환자를 치료했다는 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전문 의사들이 나환자를 치료하는 곳인 이곳에서 굳이 교회 목사가 고름을 빠는 등의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주철희 박사는 "과거에 애양원 김인권 원장에게 손양원의 한센인 치료가 진실인지 물었고, 그는 거짓이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또한 주 박사는 누군가를 무턱대고 영웅화하는 점을 경고했다. 주 박사는 "어떠한 독립운동도 하지 않은 손양원 목사를 독립지도자와 민족지도자로 칭하는 것도 옳지 않다"며 "심지어 손양원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주 박사가 이곳을 마지막 답사 장소로 정한 이유도 시민들이 이 점을 깨우치기 원했기 때문이다.

이날 답사는 손양원 목사 순교지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인민군에게 처형당한 손양원 목사 순교지가 미평동에 자리잡고 있다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비
손양원 목사의 행동을 찬양하며 그림을 덧붙여 설명한 비가 세워져 있다
주철희 박사는 손양원 목사를 찬양하는 이유로 제기된 행위들이 대부분 거짓이라고 설명했다
손양원 목사 순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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