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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치고개 집단살해사건➃

그날의 이야기

  • 입력 2018.06.18 16:40
  • 수정 2018.06.21 18:06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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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이미 ‘구봉산 이야기’를 연재했던 필자 김배선(66)씨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저자이며 다음카페 '조계산 연구소' 운영자이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조계산 주변에서 6.25전쟁 직후 일어난 많은 이야가를 들었다. 산 속으로 피신한 민간인들과 이를 토벌하려는 군인들 간에 있었던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듣고 채록하여 메모로 남겼다. ‘빨갱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으려는 증언자들의 기피도 있었지만 친근함과 꾸준함은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소설형태를 빌렸지만 그가 채록한 증언은 생생하고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이제 김배선씨로부터 ‘조계산 구석구석에서 만나는 현대사’를 한편 한편 들어보자.  '접치고개 집단 살인사건' 마지막 편이다.

 

“야~야 저기 있는 것들 냉기지 말고 다 내 놓그라.”

“예, 알았심더.”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종진 영감 뒤에 있던 하옥숙 아주머니가 최고령의 이두일 노인 옆으로 다가가, 아부지 말고도 이 동네서 몇 사람이나 돌아가셨능기요?, 하고 궁금했던 말을 꺼냈다. 여자들 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활달한 성격의 재만이 어머니가, 우리도 듣게 자세히 이야기 좀 해보시오, 했다. 그것은 손님을 위해 거드는 말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이 노인이 무표정하게 대답을 했다.

“그때 우리 동네서는 네 사람이 끌려가갖고 아버지하고 이종석이 오종호 셋은 죽고 김영철이 혼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 말이 한산(외지)인부들만 죽였다 그러지마는 들어 온지가 오래된 사람들은 지방인부나 다름이 없으니까 지방인부 쪽으로 줄을 섰으면 됐을 것인데 말이여.“

이 말을 시작으로 당시에 국민학교 3학년으로 나이가 어렸던 김형창 영감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가 봄인데 우리가 아래 길가 집에서 안 살았소. 우리 집 옆에는 살아난 김영철이 살고, 우리가 학교를 가고 있는데 쓰리코타 두 대가 사람들을 싣고 올라 가길래 알도 모르고 손을 흔들어 주면서 갔단 말이요.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 사람들을 다 쏴 죽여 버렸다고 온 동네가 난리가 나버렸더구먼.”

그러자 따로 앉아 있는 할머니들은 그동안에 언뜻언뜻 들은 적은 있지만 대부분 막 시집을 왔거나 그 전의 일이라 자세히 들은 적이 없어 귀와 시선을 집중시켰다.

접치재 아래 행정저수지 밑 당시 함바 자리 ⓒ김배선

이두일: 그때 그 사람들 잡아 갈 때 열시나 되었을까 그 독한 황 몽둥(황영환 지서주임)이가 차를 타고 저수지 밑에 당산나무 있는 공사판 함바로 갑자기 들어 닥치더니 인부들을 다 모이라 그래 놓고는 지방인부와 한산인부로 갈라 양쪽으로 서라 그래.

그때 인부들이 오십 명도 넘었을 것인데 갑자기 그래 논께 전부다 무슨 일인고 하고 눈치를 살피느라고 술렁이니까 황 몽둥이가 대뜸 큰소리를 질러버려.

황 몽둥이 무서운 것을 다 아니 얼른얼른 줄을 서는데 그래도 뒤에 있는 사람들은 머리를 굴리느라고 그런지 우물우물 하고 있단 말이여.

왜 그랬는가 하면은 어느 쪽으로 서야 무슨 혜택이 있을 것이냐 해서 그런 거여.

양쪽으로 갈라섰는데 한산(외지)인부 쪽에 한20명 되었는데 차에 타라 그러더니 그냥 싣고 가버렸어.

이종진: 우리 동네 오종호나 하쌍수 같은 사람은 해방 전에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바로 와서 칠년도 더 살았으니 지방인부나 다름이 없었는데 말이여.

그 일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은 잡아가기 전에 몇 번인가 조계산에서 반란군들이 행정 복다 이리 내려와 양식을 털어 간 것이 황 몽둥이 귀에 들어갔어. 신고를 헌 것이지. 그래 논께 이것은 틀림없이 내통자가 있는 것이라고 동네마다 쫒아 다니더니 여기 공사판 놈들 소행이라고 믿어버린 것이여.

아마도 그전부터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지.

김형창: 그 사람들을 지서로 실코 가서 가둬 놓고는 차례차례 불으라고 말도 못하게 족쳤는데 아무리 그래봤자 헌 사람도 없고 그랬다 하면 죽는데 누가 그랬다 할 것이여.

그것도 그럴 것이 외지사람들이라 근방에서 산에 들어간 사람들이 누군지 모를 거 아니라고, 그런께 황 몽둥이가 면민들도 아니고 그런께 에라 요놈들! 그러고 하룬가 이틀 뒤에 죽여 버린 것이여.

황 몽둥이는 누가누군지 모르고 순사들은 알지만 곤란하니까 면에 재무계장을 시켜서 골라내라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지라. 재무계장 그놈도 참!

이종진: 황몽둥(지서주임)이 그놈이 여기 사람이라고 봐줄 놈 이건데, 그러고도 남제. 날마다 저녁이면 전봇대 밑에다 한사람씩 앉혀 놓고 잠도 자지 말고 지키라 그러는데 어떻게 해가지고 그놈들이 한 나 잘라 버리면 그날은 전부 초상이여 나도 한번 죽도록 맞아버렸구먼.

이두일: 차가 올라가고 조금 있은께 총소리가 따다 다다 나더니 한참 있으니 내려 와서 “가서 치워라!” 그런데 무서워서 올라갈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동네 사람들이 올라가서 보니 시체들이 늘비하게 나동그라져 있어 차례차례 뒤집어 보니 한사람이 꼬무락 그러는데. 그것이 바로 영철이여.

조금 비켜 맞았던 모양이여.(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이종석이 오종호 쌍수는 죽어 버리고.

우선 영철이를 일으켜 보니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데 어떻게 해볼 수가 있어야지, 옷을 막 찢어갖고 피를 막고 업고 내려 와서 자기 집에다 눕혔지.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으니 막 엉겨서 자빠져 있고 그런 것을 줄줄이 눕혀서 거적 그런 것으로 덮어 놨어. 식구들이 와서 찾아가라고.

그런데 오후가 되니 공사판 사람들 몇 하고 가까운데 사람들이 왔는데 가족들은 얼마 안와, 고것은 객지인부들이라 식구가 여기 없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무서워서 못 왔다 그래.

이종진: 무서워서 못 왔단 말이 맞을 것이요.

웬만한 사람들은 빨갱이라 그럴까 싶어서 빠져 불고 좀 먼데서 오려면 허가를 맡아야 될 때니까. 그렇게 눈치 보는 사람이 많을 때 아니요. 정준호라는 여수총각도 하나 죽었는데 몰라서 못 찾아 갔을 것이요.

정명완: 오종호도 첨에는 살아 있었는데 곧 죽어 버렸다면서요?

이종진: 그것은 기억이 잘 안 나고 우리 동네 사람은 먼저 거기 좀 반반한곳에다 묻고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는 덮어 놨다가 뒤에 찾아 가라고 우선 그 자리에다가 둘이도 묻고 셋 이도 묻고 안보이게만 묻어 놨지. 그러다가 몇 이는 찾아 갔을 것이여. 

"그런데 산 사람(김영철)은 어떻게 되었다요?"

궁금함을 참고 있던 순구할머니가 물었다.

이종진: 어떻게 되기는 어떻게 돼, 살아났지.

농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이종진: 그때 참 고생 많이 했어라. 무슨 약이 있어야 말이지.

고름이 찔걱찔걱 나오는데 노상 파뿌리 느릅나무껍데기 그런 것 찧어 바르고…

그래도 어떻게 살아납디다. 인명이 재천이란 말이 딱 맞는 갑습디다.

그런데 영철이가 살아난 담에 말을 하는데 눈을 가리고 날날이 세우 길래 인자 죽일랑갑다 하고 있는데 빵 소리가 나면서 몸이 자빠졌는데 안 죽고 정신이 들기에 얼른 생각을 해보니 여기서 들키면 틀림없이 또 쏴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은 척 했드만 모르고 가드라고 그러고 안 있소. 지가 기절해서 엎어져 있어 놓고.(웃음)

정명완: 다 나아 가지고 소시랑고개 위로 나무 댕기고 그랬어라, 박대통령 막 나왔을 때. 그러더니 창촌 살다가 딸 따라서 강원도론가 갔다 그러지라.

이종진: 김영철이는 딸이 둘 있었는데 큰 딸 이름이 일본말로 시게꼬이고 작은 딸이 겐짱이라고 그랬어. 그런데 시게꼬가 시집을 가가지고 창촌에서 살았거든. 그래서 그리 내려가서 살다가 강원도로 갔다는데 잘 모르겠고…

재만이 모친: 아저씨는 사람이름도 영판 잘 외고 계시오잉.

이종진: 여자들이나 모를까 남자들은 다 알지라. 그때 그러니까 황 몽둥이가 한산인부하고 지방인부로 갈라서라고 그랬을 때 하쌍수 하고 오종호랑은 여기서 오래 살았은께 지방인부로 서버렸으면 됐을 것인데 도민증을 볼 것이여 뭐 헐 것이여!

이두일: 그래도 그때 죽은 사람들 중에 문길 한광수 형제들이 제일 억울해, 그 사람들은 여기 사람인데 맬정없이 그 줄로 서가지고.

정명완: 객지사람이라고 뭣인가 혜택을 줄까 싶어서 머리를 굴리다 그랬다고 안 그럽디여.

이종기: 말이 그렇지 그랬을라고.

마지막으로 이종진 영감님이 당시 하쌍수를 그곳에 묻었던 경위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아부지 나 인자 여녕 안 올랍니더

 

“묵을 것이 너무 작아서 미안헙니더.”

하옥숙 아주머니가 일어설 채비를 하며 사위에게 “요 쓰레기들 좀 담그라” 하자,

“할머니들이 그것은 우리가 치우면 된께 그냥 두세요” 하면서 사위 손에 들려 있는 박스를 빼앗아 내려놓았다.

손님들이 차를 향해 가자 볶은머리를 까맣게 물들인 넉넉한 몸매의 재만이 어머니가 “여기 술이 저렇게 많이 남았는데 가지고 가세요.” 하면서 소주박스 있는 곳을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소주병의 몸통그림에 시원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인 열 두병짜리박스 두 개 중에 하나는 그대로이고 나머지 박스에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어르신들 두고 잡수시이소.” 사위가 대신 대답하였다.

이종진 영감이 차에 오르는 하옥숙 아주머니를 향해 미안한 목소리로 “조심해서 가시고 날 잡거든 미리 연락 하세요” 하고 작별의 인사를 하는데 딴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대답이 없이 차에 올랐다.

큰길로 내려가는 승용차를 배웅하는 노인들의 시선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승용차가 접치고개를 향해 서서히 구르자 오두재위의 석양이 뒤 유리창으로 하옥숙 아주머니의 심정을 위로라도 하는 듯 조심스럽게 머리를 낮추며 비껴들었다.

승용차가 고개 위로 사라지자 나이가 제일 젊은 이종기 씨만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들어가고 모두는 지나간 모진시간들이 되살아나는 듯 접치고개를 향해 힐끗힐끗 시선을 보내면서 골목입구로 걸음을 옮기자 30년 전 이 마을로 이사를 온 순구할머니가 아까 그 양반 누구요, 하고 그동안 참았던 질문으로 착잡한 분위기를 깨웠다.

“여순사건 나고 산에서 반란군들 내려올 때 우리 동네 살다가 하쌍수 라고 즈그 아부지가 요 아래 행정저수지 막는 공사판에 댕겼는데 맬정 없이 공사판 사람들이 그 사람들 허고 내통했다고 지서주임이 스무 명도 넘게 접치재로 끌고 가서 총으로 쏴서 안 죽여 버렸소.

그때 열 살이나 먹었을까 그 딸을 즈그 어머니가 데꼬 부산으로 가버렸는데 여태 소식이 없드만 아버지 뫼 찾는다고 왔다요. 그런데 묘라는 꼴이 저모양이어서…”

승용차가 고갯마루를 지날 때 할머니가 된 딸 하옥숙의 머리에 노인들이 말하던 처참한 광경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이 겹치자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어찌 그토록 처참한 일이…”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손자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인자사 묏을 찾아서 뭣할라 그러시오.”

“그래 인자 영영 잊야 뿔자. 아부지이 불쌍한 우리 아부지!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시고 여기 안 계시시지 예. 나 인자 여그 여~녕 안 올랍니더…”

뜨거운 물이 속으로 흘러내릴 여유도 없이 승용차는 내리막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접치재를 벗어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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