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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읍 횟돌바위 경찰차습격사건①

대내골의 검은 그림자

  • 입력 2018.06.21 12:50
  • 수정 2018.06.21 18:27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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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이미 ‘구봉산 이야기’를 연재했던 필자 김배선(66)씨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저자이며 다음카페 '조계산 연구소' 운영자이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조계산 주변에서 6.25전쟁 직후 일어난 많은 이야가를 들었다. 산 속으로 피신한 민간인들과 이를 토벌하려는 군인들 간에 있었던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듣고 채록하여 메모로 남겼다. ‘빨갱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으려는 증언자들의 기피도 있었지만 친근함과 꾸준함은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소설형태를 빌렸지만 그가 채록한 증언은 생생하고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6.25 남침으로 인민군들이 휩쓸고 내려 왔다가 물러난 직후인 1950년 10월 26일 이읍 마을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보리논과 밭에 거름들을 내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이 시끄럽지 않았다면 들판은 젊은이들로 가득 찼겠지만 청년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나이든 노인과 소년들뿐이다.

국민학교 6학년 열여섯 살인 김재진 소년도 아침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바지게를 지고 마을건너편 아래대내골 밑에 있는 보리밭에 거름을 내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하여 세 번째 거름을 져다 밭에 부리고 있을 때 국방색 포장을 둘러친 벌교경찰토벌대 작전 차 두 대가 나란히 신작로를 따라 곡천 방향으로 꽁무니에 구름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데 뒤차는 앞차의 먼지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한참거리를 두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들판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마을사람들은 6. 25가 나기 전까지 거의 이틀거리로 보다시피 했던 모습을 생각하며

“인민군 놈들이 물러갔으니 인제 또 얼마나 볶아 댈란고.”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차안에 타고 있을 토벌대들과 벌교경찰서관할인 노리산줄기와 모후산 골짜기를 상상하면서 무관심한 듯 일손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몇 개월 만이기는 하지만 토벌대의 오늘 출동은 보통 때와는 달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신고가 들어왔는가? 오늘은 어디로 나가는지 느지막이 나가네.”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에 토벌작전을 나가면 마을의용대들까지 동원하여 꼭두새벽부터 출동하던 것을 수없이 보아왔기에 느지막이 가는 차가 예전 같지 않아 궁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서 가것제. 어디 가서 또 한 번 퍼붓고 올란갑구만!”

그간에 쌓인 경험으로 오늘의 상황을 꿰뚫어 보는 듯 하고는 있지만 오늘 이 작전으로 인해 자기마을에 커다란 화가 미쳐 오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상시보다 늦은 시간에 달리고 있는 두 대의 작전 차는 포와 토벌대원을 싣고 벌교에서 출발하여 모후산의 공비토벌작전을 위하여 한실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길에는 전동욱 소위의 지휘하래 낙수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소대의 업무지원 임무를 겸하고 있었다.

차가 부서진 곡천다리 위의 개천을 건너기 위해 무등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난 뒤 이읍의 새 동네인 신정 건너편 조금 전 차가 지나간 신작로 개천가에 있는 횟돌바위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조포막 뒤편 대내골 능선에서는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횟돌바위 지점에서 본 구릉목 방향의 옛길

“동무들 빨리빨리 움직여요!”

붉은 테 모자를 쓰고 동무들이라고 부르지만 어딘지 말투가 이북사람 같지 않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상상도 못하고 오로지 농사일에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조금 전 붉은 테 모자를 쓰고 총을 멘 사람의 지휘에 따라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무엇인가를 메고 들고 조포막 뒤편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그들은 웃대내골 하단 좌측비탈을 등진 곳에 멈춰 섰다. 붉은 테 모자가 주변을 한차례 살피고난 뒤 그 위치에서 횟돌바위까지의 거리와 신작로의 방향을 눈대중으로 재보고 나서는 한 곳을 지정하였다.

“여기가 딱 좋구만.”

다름이 아니라 지금 메고 들고 내려온 쏘제경기(소련제 경기관총)라고 부르는 기관총을 설치할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빠른 동작으로 기관총설치를 마친 사수로 보이는 사람이 자세를 낮추어 횟돌바위 방향을 향해 조준을 해보고 나서 손을 들어 잘 됐다는 사인을 보냈다.

사수와 부사수 두 사람을 배치하여 실탄까지 챙기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그곳에서 사십여 미터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은 아래 대내골이다. 기관총을 설치한 웃대내골의 입구이며 골짜기가 나뉘는 지점이라 거의 한 골짜기나 다름없는 곳으로 당시에는 마을에서 제법 먼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장에를 가보면 주암댐건설 이후에 덕동과 죽산으로 가는 새로운 포장도로가 옛 도로보다 위로 신설되어 큰길가의 골짜기입구로 변해 수원백씨효열비가 서 있다.

횟돌바위가 좀 더 가까워 보이는 산죽이 우거진 언덕을 고른 그들은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는 산죽 밭 속에 몸을 숨기고 우의를 둘러쓴 채 횟돌바위를 향하여 소총을 겨누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보시오 동무들 이제 준비는 모두 마쳤소. 지금 꺼멍개(경찰) 새끼들 차가 지나갔으니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돌아 올 것이요. 기다렸다가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무참하게 불 맛을 보여 줍시다.”

붉은 테 모자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조용한 박수로 결의를 다지고 나서 긴장된 상태로 대기에 들어갔다.

지금 이곳에 숨어 기습공격을 준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을사람들이 반란군이라 부르는 좌익공산사상에 휩쓸려 여순사건 직후부터 입산하여 활동을 하다가 6. 25 남침으로 인민군들이 내려오자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었으나 두 달도 못돼 후퇴를 해버리자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지휘를 받으며 인민군이 반드시 다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은신 투쟁을 하고 있는 대부분이 이곳과 멀지 않은 각지에서 입산을 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보성의 노리산과 강 건너 모후산 그리고 조계산을 오가며 활동을 하는 입산자들로서 지난밤 토벌대의 일정을 내통자로부터 입수하여 오후 귀대할 때 습격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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