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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여행에서 알게된 '가시내'의 의미

[몽골여행기2]몽골제국시절 세계를 호령했던 카라코룸에 실망해

  • 입력 2018.07.04 12:44
  • 수정 2018.07.05 06:02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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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알타이 답사단의 12일간(6.17~6.28)에 걸친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사막과 초원의 바다를 건너 거친 대자연이 어우러진 성스러운 땅 몽골! 척박하고 불편한 땅에 살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는 유목민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3000㎞ 이상의 긴 여정을 함께한 34명의 답사단 이야기 두번째입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 공동게재 기사입니다.

 

에르덴죠 사원 모습으로 사방 400m에 108개의 스투파가 있는 라마불교사원이다. 러시아가 몽골을 지배할 때 5백여명의 승려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오문수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던 나라는 어디일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는 영국? 천년의 역사를 가진 채 팍스 로마나 신화를 이룬 로마? 아니다. 중국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까지 제패한 몽골제국이다.

몽골알타이답사 여행단이 두 번째 밤을 새운 곳은 카라코룸이다. 카라코룸은 징기스칸이 건설하기 시작해 오고타이칸이 건설을 마무리한 세계 최대 몽골제국의 수도였다.

답사단을 실은 차가 카라코룸 시가지로 들어설 때 본 마을은 한국시골의 읍내만한 규모다. 실망했다. 안내를 맡은 분들이 카라코룸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지 모를 정도로 작고 볼품이 없다.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를 당하면서 몽골로 끌려간 선조들의 흔적은 오직 박물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원으로 끌려간 고려인 약 20만명... 가시내란 신조어 탄생하기도

<한·몽 문화교류사>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고려를 정복한 원은 해마다 한 두 차례 16~18세 소녀 400~500명을 뽑아 원나라에 공녀로 보냈다. 이 때 고려 민간에서는 원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여자들이 남장을 하고 다녔는데 이들을 가리켜 가시내(가짜 사내아이의 준말)란 신조어가 탄생했다.

카라코룸 박물관을 견학하고 난 답사단원들이 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세계최대왕국의 수도 박물관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않을 정도로 작았다 ⓒ오문수
옛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룸 대평원에는 에르덴죠사원만 남아있고 카라코룸 유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거북바위만 뎅그러니 홀로있었다. ⓒ오문수

이 당시 원으로 끌려간 고려인 숫자는 공주, 시녀, 노비, 공녀, 상인들을 포함해 약 20만 정도로 추산되며,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은 훗날 몽골지역에서 고려촌을 형성, 몽골인들에게 고려풍속을 전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온갖 설움과 역경을 이겨내고 제2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기황후는 고려출신 내시들과 슬기롭게 원왕실을 장악하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한반도를 가리켜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솔롱고스'라고도 불렀다. 10여년간 몽골과 교류하고 있는 신익재씨는 "몽골인들은 지금도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며 호감을 표시합니다"라고 말했다.

몽골유목민들의 집 게르...의외로 편안해

카라코룸 박물관에 입장했다. 동행한 가이드는 "고려에 대한 기록이 있다며 우리나라를 솔롱고스, 또는 고올리라고 적혀있다"고 말했다. 전시된 자료를 보며 실망했다. 세계최대국가였던 수도의 박물관 규모치고는 너무나 작고 빈약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핍박을 받고 주요한 유물을 강제로 반출당한 사실은 알고 있지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코룸 박물관 견학을 마친 일행은 가까운 곳에 있는 야영장에 여장을 풀었다. 오르혼강변에 자리한 아나르(Anar-석류)캠프장은 깨끗하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갖춰져 숙박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게르 앞에서 몽골전통복장을 입은 몽골인들 모습 ⓒ오문수
몽골 전통가옥인 게르에서 하룻밤을 지낸 답사단원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몽골 전통가옥인  게르에서는 쇠똥을 말려 불을 지핀다고 들었는데 캠프장 담당자들이 외국인 손님들을 위해 장작을 준비해 놨다. 바깥 바람이 의외로 차가웠지만 게르 안에 배치된 침대에서 침낭을 펴고 자니 편안하다.

게르 내부를 보면 한 가운데 난로가 자리잡고 문은 항상 남쪽을 향한다. 북쪽은 상석으로 집안 어른 자리이며 종교의식에 쓰는 물건들이 놓인 한 쌍의 수납함이 있고 침대 하나는 북동쪽에 있다.

동쪽은 부엌살림살이를 놓아두는 공간으로 여성 몫이다. 서쪽은 안장, 굴레 같은 마구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남성 몫이다. 아이락(마유주) 통은 벽에 걸어놓는다. 아이들과 함께 한집에서 사는 어른들의 부부관계는 어떻게 했을까. 신익재씨의 설명이다.

"부부가 초원에 나가 말 옆에 올가미를 세워 놓으면 부부관계 중이니 방해말라는 뜻으로 여겨 피합니다. 인구가 적어 고심하는 몽골정부에서는 다산가정에는 어머니 상을 제정해 훈장을 줍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러 가다 터키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터키와 몽골 연관성을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국이라며 친근감을 표시한 그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오르혼 강가에 있는 야영장으로 이용자들은 게르 안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인근에 옛몽골 수도였던 카타코룸이 있다 ⓒ오문수
우리가 머물고 있던 게르 옆에는 때마침 터키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옛몽골제국시절 한국과 터키는 형제였다며 반갑게 맞이하는 그들 텐트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왼쪽에는 터키국기, 오른쪽에는 크리미아반도 국기가 보인다. ⓒ오문수

11명이 머물고 있는 게르 앞에는 터키국기뿐만 아니라 크리미아반도 국기가 걸려있었다. 그들 중에는 언어학자가 동행해 이야기를 나눴다. 언어학자인 야브즈 귈러(Yavuz Gurler)씨의 얘기다.

"한글과 터키어는 같은 알타이어계통으로 터키어는 영어 어순인 주어 +동사+목적어(S+V+O)의 순서가 아닌 주어+목적어+동사 (S+O+V)의 어순입니다"

대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는 에르덴죠 사원만 남아

에르덴죠사원 모습. 라마불교사원이다 ⓒ오문수
카라코룸 시내가 보이는 언덕에 선 오보. 옛몽골제국의 지도를 타일로 붙여놓았다 ⓒ오문수

징기스칸이 시작해 오고타이칸이 완성한 옛몽골 수도 카라코룸은 쿠빌라이칸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쇠잔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원나라가 망하자 수도는 울란바토르로 옮겼다. 타일로 몽골역사를 기록한 언덕에 올라 오보를 살펴보았다. 몽골역사를 타일로 장식한 세 개의 판에는 몽골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부터 현재의 몽골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몽골을 침략한 청에 철저히 파괴된 카라코룸 대평원에는 왕궁석재를 이용해 지은 에르덴죠 사원만 남아있다. 1586년 건축한 사원은 몽골에 세워진 최초의 라마불교 사원으로 티베트불교를 전승하고 있다. 가로 400m, 세로 400 성채로 사방에 성문이 있으며 108개의 스투파가 둘러쳐져있다. 

성문을 들어가면 여러 채의 사원들이 보이며 곳곳에 활불과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사원 북문을 나서 500m쯤 가면 거북바위가 있다. 가운데가 움푹 패인 걸보면 비석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에르덴죠사원에서 마주보이는 언덕에 있는 남근석. 건너편에 보이는 계곡이 여자의 음부를 닮아 수행자들의 정신이 흐트러질까 염려해 설치했다고 한다. ⓒ오문수
에르덴죠 사원 옆에서 관광객들에게 양고기를 굽고있는 식당종업원 ⓒ오문수

에르덴죠 사원이 마주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가니 관광객들이 남근 모양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남근석을 구경하고 있었다. 남근석이 향한 방향에는 여자의 음부를 닮은 계곡이 있었다. 설에 의하면 에르덴죠 사원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여근곡을 바라보며 수행심이 흐려질까 염려돼 설치했다고 한다. 

에르덴죠사원 너머 황량한 대평원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한창 때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조공품이 들어와 물산이 풍부했을 사라진 도시. 인걸은 다 어디로 가고 메뚜기들만 찌르르 소리를 내며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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