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소개글] 이미 ‘구봉산 이야기’를 연재했던 필자 김배선(66)씨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저자이며 다음카페 '조계산 연구소' 운영자이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조계산 주변에서 6.25전쟁 직후 일어난 많은 이야가를 들었다. 산 속으로 피신한 민간인들과 이를 토벌하려는 군인들 간에 있었던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듣고 채록하여 메모로 남겼다. ‘빨갱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으려는 증언자들의 기피도 있었지만 친근함과 꾸준함은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소설형태를 빌렸지만 그가 채록한 증언은 생생하고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
“반란군들이 선암사정문 앞에서 나무치기 온 이장을 낫으로 찍어 죽여가지고 나무에 메달아 놨어”
이것은 선암사 인근마을 노인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전해오던 말이다.
뻘똥나무 열매가 붉게 익어가는 늦여름 어느 날 밤이었다.
잠자리에 든 접치재 아래 두월 마을의 서른한 살 강성옥 청년은 밤중에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문을 열고 내다보며 옳지 잘 됐다 내일까지 계속 쏟아져 버려라 하면서 다시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한 번 깨고 나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된다는 생각에 오히려 잠이 들지 않아 빗소리로 신경이 쏠리며 뒤척이게 하였다.
제발 비가 계속 쏟아지라고 바라는 이유는, 낮에 이장인 정문이 형님이 우리 동네 사람들이 내일 선암사 뒤로 나무를 치러가야 된다며 해당되는 집에서 아침 여섯 시 전까지 한 사람씩 회관 앞으로 모이라고 집집마다 알리고 다녔기 때문에, 차라리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쏟아지면 안 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나무치기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에서 일으킨 여순사건이 실패하고, 군인들과 함께 봉기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이 지리산 권으로 숨어들어 은신투쟁을 하게 되자 이듬해부터 토벌작전이 전개되는데 토벌대들의 안전을 위해 지서에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통행로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내는 부역을 말한다.
이 나무치기는 조계산 전역에서 이루어졌으며 인근마을 사람들이 거의 매일 동원되어 이장의 인솔아래 책임구역의 나무를 베고 치워야만 했다.
아내가 일어나 밥 먹으라고 깨워 눈을 비비며 방문부터 열고 밖을 내다보니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였다.
“에잇! 비나 좀 계속 안 쏟아져 불고…”
대충 얼굴에다 물을 바르고 나서 시커먼 보리밥 한 그릇을 치운 뒤 삼베에다 싸주는 주먹밥을 허리에 차고 회관 앞으로 나가니 이장인 6촌 형은 먼저 나와 있었고 마을사람들도 하나 둘 연장을 챙겨 들고 찌부득 한 얼굴로 모여들고 있었다.
“서~엉(형) 날씨도 이런디 오늘은 안 갔으면 좋겠구만.”
자기보다 열 살쯤 위형인 이장을 향해 가기가 싫다는 말이다. 이장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골목길에다 시선을 둔 채 대꾸를 하지 않으려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 갔다가는 어쩔라고! 안가고 된다냐?”
만약에 가지 않았다가는 자기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다.
동생을 향해 책망처럼 말하는 퉁명스러움 속에는 나라고 가기 싫은 사람들을 억지로 데리고 가고 싶겠느냐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나이를 그만큼 먹은 동생 놈이 뻔히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섭섭함에 참으려다가 튀어나온 말이다.
사람들이 웬만큼 모이자 이장이 인원을 확인하였다. 두월 마을의 총 호구 수는 50가호 정도 되지만 오늘 가는 인원은 서른 두 명이다.
매번 마을의 총 호수대로 모든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지서에서 마을에 따라 인원을 지정하여 주기 때문에 그만큼만 가면 되는 것이었다.
부역인원의 차출은 공평하게 한집에 한사람씩이 나오게 되고 그날 빠진 집은 다음에 차례로 돌아가면서 부역에 동원이 된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 확인을 해보니 남자가 못나와 대신 여자가 나온 집도 여섯 집이나 되었다.
인원 확인을 마친 이장은 사람들을 인솔하여 선암사로 향했다.
매일 계속되는 삶의 고통에 이장을 따라가는 마을사람들의 걸음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말없이 그저 앞사람의 등만 따라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항상 그렇지만 출발시간은 거의 아침 여섯에서 일곱 시 사이다. 때가 늦여름이라 날만 맑으면 훤할 시간이지만 비는 그쳤어도 당장이라도 다시 내릴 것 같이 구름이 꽉 끼어 있어 어둑어둑 하였다.
두월에서 선암사로 가려면 건너편 밤밭골과 신전으로 해서 괴백이재로 질러가는 산길도 있지만, 안전한 아랫길로 가기로 하고 서평으로 내려가다가 거숫굴재를 넘어 빗갱이 앞을 지나 죽림으로 돌아갔다.
절 앞에 도착을 하여 보니 여덟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우선 지서에서 나온 사람이 와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장은 오늘 벌채구역을 지서로부터 설명들어 대강 알고 있으므로 책임량을 빨리 마치려면 곧바로 올라가서 일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혹시 몰라 사람들을 쉬게 하고 잠시 기다리니, 담배 한 대를 피울 시간쯤이 됐을 때 지서의 지시를 받아 나무치는 일을 시키는 남강사람이 와서 우리들을 인솔하였다.
대각암 앞을 지나 비로암 길로 한참 올라가더니 월출암 터입구에 도착하자 오늘은 여기서 위 어느 지점까지 치라고 정해주고는 내려가 버렸다. 그다음부터는 이장이 알아서 했다.
모두들 싸들고 온 주먹밥과 연장들을 내려 모아놓고 이장이 댓명씩 짝 지어준대로 조를 이루어, 길 양옆으로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나무를 베어 눕히고 자르고 치우는 일은 평생 몸에 밴 일이라 어렵지 않게 해 나갔다.
만약 이런 일을 하고 있을 때에 반란군(당시의 호칭)들과 마주치면 자기들을 잡기 위해 경찰을 도와주는 반동이라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경찰이 한 사람이라도 총을 들고 따라와서 지켜주면 좋겠지마는, 애초부터 경찰들은 오지 않고 지서에서 시킨 사람이 와서 정해주고 이장 인솔 하에 책임량을 다 하면 알아서 내려가는 것이었다.
“경찰들은 더 무서워서 작전이 아니면 아예 산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라 그러제.”
다행인 것은 낮에는 반란군들이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의 지서주임은 임상기라고, 독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패는 건 자기 맘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작살을 내었고,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은 눈도 깜짝 안 하는 탓에 빨갱이로 몰린 사람은 살 생각을 말아야 했다.
그 사람은 쌍암으로 오기 전에는 월등지서에 근무를 했었는데 월등에서 말 자리나 한 사람들은 모두 죽여, 거짐 스물 몇 명을 죽였다고 소문이 나서 임상기라 하면 모두가 벌벌 떨었다.
그래서 이장들도 지서에서 시키는 일이 많아 죽을 지경인데다 조금이라도 어겼다가는 작살을 내기 때문에 그때는 서로 이장을 안 하려고 그런 때였다.
오후 네 시가 되었을 무렵 할당량을 다 마쳤다고 생각한 이장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은 이만 허먼 되얐은께 모두 연장들 챙겨가지고 내려갑시다.”
두월 사람들의 나무치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주먹밥과 맹물로 고된 하루 부역을 마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에 서로 의지하며 고된 발걸음을 선암사로 옮겼다. 하지만 그 시간 선암사에는 뜻밖에도 대낮에 반란군들이 내려와 절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호랑이의 아가리를 향해 들어가고 있는 것과 같았다.
선암사 정문 앞의 참사
빨갱이들이 와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모두가 무심코 절로 들어서니, 낯선 사람들이 눈에 띄고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총을 든 사람이 보이는데 그들이 반란군들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르르 들어가는 우리들을 보고 그들도 놀라는 듯 보였으나 곧 총 든 사람을 앞세우고 우리들에게로 와서, 허튼짓을 하면 다 죽인다,면서 모두를 정문(일주문)앞으로 인솔하였다. 겁은 났지만 그들은 어지간하면 사람들을 상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는 경험을 떠올리며 시킨대로 따랐다.
우리들이 들고 있는 연장들을 모두 빼앗고 나서는 모두를 줄지어 앉히고서 열댓 명이 둘러싸고 붉은 줄 모자를 쓴 대장이 앞에 서서, 어디 가서 무었을 하고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사실대로 나무를 치고 온다고 말하니 버럭 화를 내면서 인민들을 해방시키려고 투쟁을 하는 자기들을 잡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면서 책임자는 일어서라고 했다.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지만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곧 이장이 머뭇거리며 일어서자 한 사람이 달려들어 반동 앞잡이는 용서할 수 없다며 앞으로 끌어내었다.
사색이 된 이장의 손을 뒤로 돌려 일주문 우측의 커다란 나무에 묶어 세워 놓고는, 자기들은 인민들의 편이라는 붉은 줄 모자를 쓴 지도자의 연설이 한참 더 계속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잔뜩 겁에 질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제발 죽이지는 말았으면 하는 두려움에 생각이 멈춰 버렸다.
연설이 끝나자 총을 든 사람이 이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다가갔다.
곁눈질로 훔쳐보는 마을사람들은. 이제 끝이라는 절망감에 마치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총구처럼 공포의 순간이 머릿속을 자포자기의 공황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 강정문 이장을 본보기로 처단하려는 사람들은 조계산에 은신하여 투쟁을 하고 있는 입산자들이었다.
낮에는 경찰세상, 밤이면 그놈들 세상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경찰과 빨갱이들 사이에는 낮과 밤의 활동경계가 분명하여 반란군들이 낮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거의가 생각을 않던 때였다.
그러나 허허실실이라고 하였던가? 막다른 상황에서 새벽부터 선암사로 들어 갔으나 새벽까지 내린 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지서의 방심 때문이었는지 그날은 지서에서 보낸 감시자나 외부에서 절로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스님들을 협박하여 아침 겸 점심을 시켜먹고 마을에 야간 보급투쟁을 하러 갈 시간인 저녁까지 머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나무를 치고 내려온 두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 이들은 송광사 쪽 봉대미골에서 토벌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요행히 살아서 숨어 있다가 밤새 선암사 쪽으로 보급투쟁을 갔다. 그러다 새벽에 비가 내려 선암사로 내려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고 거의가 이읍 마을에서 입산한 사람들이었다.
대장이 연설을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반란군 중 몇 명은 살기가 등등했다.
이장을 향해 총을 들고 다가서는 사람을 대장이 불러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총을 쏘면 소리가 나서 안 된다는 뜻이다. 그놈도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놈이 사람들이 들고 있던 톱과 낫 등 연장을 압수하여 따로 모아 두었던 곳으로 가서 낫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자 대장이 고개를 까딱하니 옆으로 다가가 그대로 내리 찍었다.
강 이장이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바로 보지 못하던 눈마저 질끈 감아 버렸다.
연이어 몇 차례 여기저기를 찍어 대니 이장은 피를 쏟으며 머리를 떨어뜨렸다.
태연하게 이장을 낫으로 찍은 놈은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사람이 저처럼 악독할 수가 있을까?
그 순간 같은 놈들이라도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쉽게 숨을 거두지 않고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낫질을 계속하니 끝내 조용해지고 말았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의 순간이었다.
그래놓고 그들은 절로 들어 가버렸다.
너 아버지 볼래?
그놈들이 절로 들어간 뒤에도 모두가 겁에 질려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혼비백산이란 온 세상이 하얗게 멈춰버린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얼만큼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지서에 안 알리고 이러고 있다가 어쩔라냐,고 했다.
모두에게 또 다른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곧 이장의 다른 동생 되는 강봉원이 나섰다.
이미 그놈들한테 당할 것은 당해 버렸는데 이제 더 뭣이 겁나냐는 표정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지서에서 올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하고는 한 사람을 시켜 빨리 알리라고 보내고 시체 옮길 준비를 하였다.
성옥이 청년은 사람들과 함께 나무를 베어 칡넝쿨로 엮어 임시 들것을 만들었다.
그동안에 절 안으로 들어가 보고 온 봉원이가 그놈들 어디로 갔는지 없다고 하여, 한가지 두려움은 놓이는 듯하였다.
장군봉의 그늘이 어둠을 내릴 무렵 지서에서 순경이 자전거를 타고 올라왔다. 사람들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모두 내려가고 시체는 지서로 옮기라고 했다.
여태까지 긴장과 공포에 쌓여 뭐가 뭔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맥이 풀렸다. 남자들 십여 명이 교대로 들것을 옮기고 다른 사람들은 먼저 지서로 내려갔다. 완전히 어둠이 깔린 뒤에 시체를 들고 지서에 도착하니 이미 보고를 받은 임상기 주임이 갖다 묻으라고 지시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마을사람들로부터 연락을 받은 이장 부인은 무서움에 감히 나설 생각도 못했다. 시체를 가지고 가라하여 동네로 옮겨 오기는 했지만, 밤이 되어 당장 매장을 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걱정은 그 시신을 가족들에게 어찌 보이느냐는 것이었다.
두월마을은 강 씨들이 가장 많은 동네였다. 어르신들이 의논을 하여 가족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으고 부인에게는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작 시신이 마을입구로 왔을 때 바깥에서 죽은 흉사라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부인은 넋 나간 사람처럼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붙잡고 말리니, 하는 수없이 손을 놓고 주저앉아, 참았던 통곡을 쏟아내며 몸부림을 쳐, 또 한 차례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이장에게는 열여덟 살짜리 큰 아들과 밑으로 남동생 하나와 열서너 살 된 막내 여동생이 있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는 지애비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야 되지 않겠느냐는 사람도 있어 날이 새고 장지로 가기 전에 큰집 형님이 큰 조카에게 “너 아버지 볼래?” 하고 물으니 분위기를 알아차려서인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흔들고는 나가버렸다.
그러고 나서 가까운 친척 몇몇 사람들이 상여는 말할 것도 없고 눈물로 따르는 사람도 없이 조용히 시체를 마을 안쪽 산비탈로 옮겨다가 형태만 있는 봉분으로 안장을 하고 내려오니, 두월 이장 강정문의 억울한 영혼은 그렇게 이승에 한을 남긴 채 사랑하는 가족과는 이별의 대면도 못하고 쓸쓸한 하늘 길로 떠나야 했다.
물론 십수 년이 지난 후에, 묘는 접치재 좌측의 가락골로 이장을 하여 모습을 갖췄다. 하지만 당시 그 참극이 가족들에게 준 고통은 말할 것 없고 이웃들이 받았던 충격 또한 상상을 초월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영원한 교훈처럼 전해내려 오고 있었으나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점점 희미하게 잊혀가고 있다.
2011. 2
덧붙여
이 실화는 1949년 늦여름 조계산의 선암사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우리 역사상 동포 간의 사상 전쟁이 빚어낸 사건으로, 선량한 주민 한사람이 처참하게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이야기이다.
2010년 2월 24일 현장의 충격을 함께 한 유일한 생존자 강정문(91) 옹을 찾았을 때 편치 않은 노구임에도 증언을 하시는 내내 60여 년간 가슴에 묻어온 과거를 되새기는 것이 힘들어 격한 감정을 억누르느라 말문이 막혀 알아듣기 힘들 때에는 부인께서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나무에 매단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으며 묶어 놓은 것이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가장인 형님(이장)이 그렇게 죽고 나서 형수와 2남 1녀인 가족들이 받은 고통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어. 먹고 사는 것이야 다 어려웠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정신적인 고통을 누가 다 알거여. 지금은 형수와 조카들도 모두 죽었지.“
하실 때는 노안에 이슬을 보여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연재를 앞두고 2018년 5월 22일 두월마을 강정문 옹의 집을 다시 찾았을 때에는 청색대문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이웃집에 물으니 영감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작년 시한에 돌아가셨다는 대답을 듣고 빨리 찾아뵙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죄송한 마음으로 조용히 묵념을 드리고 나왔다.
이제 당시의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 계셨던 마지막 한 분마저 떠나가셨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자유. 민주. 정의는 피거름 위로 태어날 것이다.
증언을 해주신 강성옥(두월 91) 최선용(괴목 86) 김영환(이읍 86) 어르신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고인들께는 명복을 빕니다.